▲ 김대건 신부 ⓒ(사진제공: 새남터 기념성당)

김대건 신부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1846년 9월 16일, 그를 둘러싼 회자수(사형수의 목을 자르던 사람)들이 칼을 들고 차례로 그의 목을 내리쳤다. 8번째 칼날에서야 그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그렇게 스물다섯 해의 짧은 생을 마감한 청년은 이 땅에 천주교의 씨앗을 뿌렸다.

이는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의 이야기다. 그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의 피가 있었기에 이 땅에 천주교가 뿌리 내리고, 오늘날 수많은 천주교인이 탄생할 수 있었다.

가톨릭은 이 땅에 들어온 후, 100여 년 동안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에 이르는 4대 박해 동안 약 1만 명이 신앙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그중 김대건 신부의 집안은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다. 증조부인 김진후는 한국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입교해 이후 유배와 10년간의 옥고 끝에 순교했고, 종조부 김한현도 천주교 신앙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도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신앙을 시작한 김대건 신부도 포도청에서 3개월 동안 40차례의 문초를 받고, 사형이 선고돼 서울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목을 베고 군문에 매달던 형벌)으로 순교했다.

그의 순교를 기념하는 새남터 순교성지 기념관에 가면 사형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이 있다. 그를 둘러싼 회자수들이 날카로운 칼날을 들고 있으며, 그의 양쪽 귀에는 화살이 박힌 채 피가 흐르고 있다. 실제 상황이 아닌 작은 모형일 뿐인데도 잔인하게 느껴진다.

김대건 신부를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그를 ‘한국인 최초의 신부’라는 수식어와 함께 기억한다. 그만큼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순교한 나이가 25살, 젊디젊은 청년이었다는 점은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가 옥중에서 보낸 마지막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중략)…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앗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주님을 위해 살라.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중략)… 우리는 미구에(조만간) 전장(戰場)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죽음을 앞두고 있음에도 담담하고 교우들을 걱정하는 의젓한 모습이 나타난다.

김대건 신부는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를 순방하던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으며, 그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당시 모방 신부는 박해가 심해 국내에선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그와 최양업, 최방제를 중국 마카오로 건너가게 해 파리외방전교회의 칼레리 신부로부터 신학과 서양학문, 프랑스어, 중국어 및 라틴어를 배우게 했다. 그때 김대건의 나이는 스무 살이 채 안 됐다.

이후 다시 서울로 온 김 신부는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곳 에 있는 금가항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탄생했다. 그리고 다시 상하이를 출발, 40여 일 만에 강경 부근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했다.

김대건 신부가 사목 활동한 기간은 1년여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기간에 한국인 성직자의 자질을 보여주며 사목능력을 입증해 조선교구의 부교구장이 됐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그의 일을 다하다 체포됐다. 1846년 5월 14일 주교로부터 서해를 통한 선교사 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편지와 지도를 대신 보내고 순위도로 왔다. 그곳에서 관헌들에게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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