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풍 [李基豊, 1868.11.21~1942.6.20]
한국의 장로교회 목사 ·순교자. 한국장로교회 초대목사 7인중 1인. 평안남도 평양 출생

“산 소망이라 함은 세상의 소망과 비교하여 하는 말이니, 세상의 소망은 뜻과 같이 얻기도 어렵고 얻는다 하더라도 필경 부패할 것이다. 청운의 지망이 있는 자가 그 지망을 다 말할 수 없으니 헛된 소망이 되기 쉽고, 또 얻는다 하여도 영구한 것이 아니다.”

한국의 사도 바울과 같던 청년 이기풍

이기풍 목사는 1865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1883년까지 개인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여섯 살 때 사서오경을 외웠으며, 열두 살 때는 백일장에 나가서 붓글씨를 써서 장원이 되기도 할 만큼 총명했다.

그뿐 아니라 묵화에도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그믐 괄괄한 성격으로 싸움과 술을 좋아해서 젊을 날을 허송세월하면서 서양선교사들을 박해하며 지내기도 했다.

그가 총명하고 재주가 많음에도 그러한 것들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한 것은 홍경래난 당시에 역적으로 몰려 사형을 당할 뻔했으나 구사일생으로 평양성을 빠져 나와 황해도 구월산에서 숨을 거둔 증조부의 영향 탓도 있었다.

이 일로 기풍 목사의 부친은 다시 평양으로 이사를 와 농민으로 행세하며 살게 되었고, 그곳에서 이기풍 목사가 태어난 것이다.

그는 증조부의 일로 인해 관료가 되는 길도 쉽지 않았고, 또한 외세의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인하여 조선이 몰락해 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곱지 않았을 것이다.

청년 이기풍은 술은 물론이고 박치기의 명수로서 아무도 이기풍을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돌팔매질을 잘하여, 매년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石戰에서 동편 대장을 맡기도 했다.

하루는 거나하게 술이 취해서 건들거리며 평양 거리를 활개 저으며 걸어가고 있는데, 마침 평양좌수의 행차가 지나가는 것을 발견하고는 평소 도도하게 말을 타고 가는 그런 행렬을 싫어했던 이기풍은 말을 탄 평양 좌수가 자기 앞을 지나가자, 달려들어 다리를 잡고 좌수를 땅바닥에 내동이 쳤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이기풍은 꼬박 석달을 목에 형틀을 쓰고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이뿐이 아니었다. 당시 위정척사운동의 영향으로 서양 오랑캐의 침입을 크게 경계하고 있던 터라 무모한 이기풍도 서양 오랑캐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양코배기라 불리던 서양 선교사들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어느날 길거리에서 보기 드문 체구에다가 도도한 몸짓으로 가슴을 내밀고 걸어가는 서양인을 보았는데 그 꼴을 보고 비위가 거슬렸다.

이 분이 마포삼열 (S. A. Moffett) 선교사였다. 이기풍은 마포 선교사의 뒤를 따라가 집을 확인하고, 석전패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저 양코배기가 무엇하러 우리나라에 왔을까? 저것들도 날도둑놈들이 아닌가? 그렇다. 저놈들을 우리나라에서 하루바삐 몰아내자."

이기풍은 대 여섯 명의 친구들과 마포 선교사의 집으로 떼지어 몰려가, 집안으로 신나게 돌을 우박 같이 쏟아 부었다.

집안에서 모든 것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지만, 돌을 다 던져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직접 거만한 양코배기와 대결하지 못한 것이 분하였지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로부터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장터를 지나던 이기풍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확인하다가, 그 양코배기가 책을 들고 서투른 조선말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반사적으로 이기풍은 발 밑에 있는 돌을 들고 다가갔다. 낌새를 알아챈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하자, 이기풍은 오른 팔을 두어 번 돌리고 돌을 날렸다.

날아간 돌은 마포 선교사의 턱에 정통으로 맞았다. 마포 선교사는 그 자리에 거꾸러졌고, 삽시간에 낭자하게 흐르던 피가 땅으로 배어들었다.
군중들도 뿔뿔이 흩어졌고, 이기풍도 시치미를 떼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밖에도 한참 건축하고 있던 장대현교회를 때려 부수기도 하는 등, 기독교를 서양 오랑캐의 종교로 보고 수차례 박해를 가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悔改)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이기풍은 원산으로 피난을 했다. 원산에서도 그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등 못된 짓을 골라했다. 그러던 차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자신의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며 기독교인이 되기를 결심한 것이다.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였다. 그 후에 마포삼열 선교사를 찾아가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여 용서를 구하게 된다.

기근과 가난에 굶주리던 이기풍은 얼마안가 있는 것 마저 팔아야하는 안타까운 신세가 되었다. 과거의 기고만장했던 패기도 다 사라지고 풀이 꺾인 채 삶을 개척할 방법을 찾아볼 수밖에 없게 된 그는 친구들의 권유로 담뱃대에 그림을 새겨서 팔기 시작했다.

하루는 그림을 그린 담뱃대를 한 묶음 들고 힘없이 걸어가다가 스왈른(Swallen) 선교사를 보게 되었고, 이기풍은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평양에서 돌로 친 양코배기의 화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이기풍의 양심은 괴로워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왜 죄없는 사람을 돌로 쳤을까? 그 사람은 왜 돌을 맞았어도 반항을 하지 않았을까?'
언제든지 만나면 사과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질 것만 같았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으라고 권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채 집에 돌아와서 마루에 누워, 평양에서 돌팔매질로 양코배기의 턱을 깨어 피를 흘리게 했던 일을 한참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더니 머리에 가시관을 쓴 분이 나타났다. 너무나도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도 없는데, 이런 소리가 들렸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너무나도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기풍은 그 자리에 엎드렸다. 생전 눈물을 흘릴 줄 몰랐던 눈에서 회개의 눈물이 콧물과 뒤범벅이 되어 한없이 흘러내렸다. 과거에 지은 수많은 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나서 아무리 가슴을 치고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통곡을 해도 이 죄는 누구에게도 사함을 받을 길이 없을 것 같았다.

생각다 못해 전에 자신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던 자(김석필)의 집에 달려가 꿈 이야기와 죄의식에 대한 고민을 솔직하게 낱낱이 고백하였다. 그 말은 들은 김석필은 이기풍의 손목을 잡고 스왈른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김석필은 얼떨떨해 있는 이기풍을 대신해 자초지정을 차근차근 털어놓는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왈른 선교사의 얼굴은 희색이 만면해지더니 초면인 이기풍의 손을 잡고 머리 숙여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였다. 기도를 마치고 스왈른 선교사는 서툰 조선말로 이기풍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분명히 당신을 예수님이 귀하게 쓰실 징조요, 당신 죄는 예수님이 다 사하여 주셨소, 기뻐하시오"

이기풍은 또 스왈른 선교사에게 평양에서 마포 선교사에게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맹세한다.

이후부터 이기풍은 전혀 딴 사람이 되었다. 동만 트면 나가서 전도하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완전히 예수에 미쳐버렸다. 때는 30세의 혈기왕성한 청년시절이었으니 피곤한 줄을 몰랐다. 어떻게나 열심히 전도를 하고 다녔는지 하루는 거처하고 있는 집주인에게서 쫓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기풍에게는 쫓겨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영원한 지옥에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함을 입은 이 감격을 무슨 방법으로 표현해야 될지 몰라 이기풍의 젊은 가슴은 성령의 불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1894년 그는 슬왈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뜨거운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다. 1898년부터 1901년까지 매서인으로 함경남북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이어 1902년 부터 1907년까지는 황핼 안악, 문화, 신천, 해주 등지를 도며 조사로 시무했다. 한편 이때 마펫 목사의 권고를 받고 1903년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길선주, 양천백 등과 함께 최연소자 신학생으로 입학하여 학업에 열중하게 된다.

제주도에서 선교활동

그가 졸업하던 해에 독노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서경조,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방기창, 송린서 등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이기풍 목사는 이 독노회의 결의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외지 선교사로 임명되어 제주도로 떠났다.

한편 그의 부인 윤씨는 선교사 이길함의 양녀이며 숭의여학고 제1회 졸업생으로 당시로서는 엘리트 여성이었다.
한편 이때는 이미 정부가 기독교의 선교를 허락한 때이었지만 1899년의 신축교난으로 제주도 주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갖은 편견은 여전히 가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주민들의 위협을 당해야 함을 물론이고 굶주림과 생활고까지 견뎌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직 복음 전파에만 전심전력을 다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5∼16)’ 이 목사는 이 말씀을 마음에 깊게 새기고 ‘동양의 예루살렘 제주’를 꿈꿨다.

그러나 1907년 인천항을 출발, 목포를 경유해 제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은 이 목사는 거센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중 구사일생으로 이듬해 봄 제주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며칠이 지나도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고 어쩌다가 사람을 만나면 제주 방언을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심신이 지친 이 목사는 해안가에 전도를 나갔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한 해녀의 도움으로 깨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한 해녀의 도움으로 살아난 이기풍 목사는 처음으로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이곳에서 며칠 머무는 동안 이기풍 목사는 해녀에게 전도를 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해녀의 마음을 움직여, 이기풍 목사에게 제주도에서 복음의 첫 열매를 얻을 수 있도록 하셨다.

그 후, 1918년 광주 북문안교회 초대 목사로 전임된 이후 1921년 순천중앙교회 시무 중 장로회 10대 총회장을 역임하게 된다. 이후 순천과 제주 등에서 사역하다 1934년 70세의 나이에 우학리교회에 부임, 돌산과 완도 등 도서지방을 돌며 전도하고 교회 개척에 힘썼다.

신사참배 반대, 고문으로 순교

일제의 치하에서 민족교회가 심한 박해와 시련을 겪을 때, 과감히 일제에 대항하여 교회를 굳건히 지켰던 이기품 목사. 1936년을 기점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일제에 정면으로 맞서 반대하던 그에게 일제는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순천노회 산하 오석주, 나덕환, 김상두, 김순배 목사 등과 함께 1938년 체포했다.

칠순의 노구를 지탱하기도 힘든데다 일경의 심한 취조와 고문은 그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광주형무소로 압송되기 전에 졸도하여 벙보석으로 출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로와 고문 등으로 이미 건강이 심히 악화되어 있던 그는 그의 마지막 사역지인 우학리교회 사택에서 1942년 6월 20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그의 유해는 우학리에 안장되었으며 11년 후인 1953년 전남노회 주선으로 광주 기독묘지에 이장되었다.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에서는 그의 부인 윤씨에게 표창을 주었다. 1962년 12월 25일 신여성으로서 평생 이기풍 목사의 성역을 도와 헌신한 부인 윤씨도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이기풍 목사의 설교

<산소망> 中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벧전 1:34)

산 소망이란 무엇이냐?

산 소망이라 함은 세상의 소망과 비교하여 하는 말이니, 세상의 소망은 뜻과 같이 얻기도 어렵고 얻는다 하더라도 필경 부패할 것이다. 청운의 지망이 있는 자가 그 지망을 다 말할 수 없으니 헛된 소망이 되기 쉽고, 또 얻는다 하여도 영구한 것이 아니다.
황금에 뜻을 둔 자도 역시 다 얻는 바 아니요, 얻는다 하여도 결코 저에게 행복이 되지 못한다. 기타 세상의 모든 욕망이 다 그렇다.
그런 고로 이것을 가리켜 부끄러운 소망, 썩어질 소망, 수치의 소망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에게 속한 모든 소망은 산 소망이요, 영화의 소망이요, 부끄럽잖은 소망이나, 이를 못 얻을 이가 없고, 얻는 자는 영원의 행복과 영원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 산 소망의 오묘함을 지금 보자.

소망의 확실한 증거

우리의 소망의 확증은 무엇이냐. 즉 그리스도의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심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실망 낙담하였지만,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새 소망이 일어났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로 인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하였다. 예수는 신자의 머리가 되시사 처음 익은 열매로 부활하였다. 최초의 꽃은 모든 꽃의 모형이요, 최초의 이삭은 한절의 이삭의 모형이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모형이다. 역사상에 예수 부활의 사실이 우리 부활의 확신이 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심을 그대로 믿을 수가 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 산 소망된 까닭이다. 어떤 이가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자연한 일이라 하여 일종의 미신으로 장사하여 버리려고 하지마는 그런 어리석은 일은 없다. 왜 그러냐 하면 그리스도의 그리스도된 소위는, 즉 그가 구주된 소위는 그의 부활에 있다.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가 만일 부활하지 아니하였으면 그는 헛되이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증은 그의 부활에 있고, 우리 신자의 부활의 보증도 그의 부활에 있다. 만물의 부흥, 우주의 개조, 우리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보증하고 있다. 아 위대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 죽음의 법칙을 이기시고 살아나셨고, 인력의 법칙을 이기고 승천하셨다.

참고: 이기풍 선교 기념관/
한국 기독교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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