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호 소설가

요즘 세간에 ‘나는 꼼수다’란 인터넷 팟캐스터가 화제다. 하도 인기가 좋으니까 여기에 출연하고 싶어 하는 인사들이 꽤 많단다. 이 방송에 편성하여 얼굴 좀 팔리려고 말이다.

그런데 내 기억에는 또 하나의 ‘나꼼수’가 자리 잡고 있다. 기발한 말솜씨와 돌출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했던 그 나꼼수가!

나꼼수는 내 대학 동창이다. 별명이 나꼼수고 본명은 ‘나상수’다. 재학 시절 그와 나는 복학생 모임인 ‘늙다리 그룹’ 멤버였다. 늙다리 그룹은 1학년 1학기 때 벌써 군대를 갔다 온, 말 그대로 나이가 지긋한 복학생들의 동아리다. 당시 그 모임의 총무가 바로 나였다. 그의 별명이 나꼼수가 된 사건을 나는 아직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그런 별명을 붙여준 게 바로 나였으므로.

# 10월이 다가온 어느 가을날이다. 함께 듣는 심리학개론 시간이 끝나자 상수가 뒤통수를 긁으며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사실 오늘이 말이야….” 상수가 뒷말을 잇지 못하고 주뼛거렸다. 내가 물었다.  “무슨 날이야?”
그러자 상수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호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멤버들한테 연락해서 점심이나 같이 하자고 해.”

그날 오후는 마침 강의가 없었다. 내가 상수의 말을 전하자 늙다리들의 반응은 대부분 아까 나와 비슷했다.
“왜? 오늘이 무슨 날이래?” 사실 상수가 점심을 사겠다는 건 전에 없던 일이었던 것이다.

“말투로 보아서는 오늘이 그 녀석 생일 같기도 해. 본인이 딱 부러지게 밝힌 건 아니지만.” 나는 상수의 태도를 떠올리며 당연히 이 같은 상황판단을 내렸다.

“그럼 그냥 가기가 무엇하잖아, 몇 푼이나마 모아서 작은 선물이라도….” 이런 의견을 내놓은 친구도 있었지만 우리는 빈손으로 가기로 했다. 핑계는 본인이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거였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든 때문이었다. 녀석은 그때 벌써 꾀바르고 튀는 행동에 일가견이 있다는 소문으로 이름이 났던 것이다.

하여튼 우리는 시간에 맞추어 상수가 지정한 학교 앞 중국집으로 갔다. 먼저 와 있던 상수는 우리가 도착하자 바로 요리를 이것저것 주문하더니, 이런 날은 술도 한잔해야 한다며 배갈까지 시켰다.

음식을 먹고 술잔이 오가는 동안 상수는 심심찮게 대화거리를 만들어내었다. 이를테면 6.25 전사자 유해 발굴을 위한 미국 정부의 끊임없는 노력이라든가, 제대로 된 나라라면 유해는 차치하고라도 포로송환문제만은 우리 정부도 당당하게 북한에 요구해야 한다는 얘기 따위가 그것이었다. 이때쯤 늙다리들의 긴장은 자연스레 풀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웬걸, 배가 부르고 식탁의 음식이 거의 동나자 상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화투를 한 모 꺼내놓았다.
“자, 이제 슬슬 끗수 보기로 식대 계산할 사람을 가리자고. 아니면 공평하게 회비를 걷거나.” 방심하고 있던 우리에게 상수의 이런 말은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그럼 이게… 너 생일 턱이 아니었어?”

아뿔싸 싶었든지 우리 중의 누군가가 이렇게 더듬거리자 상수는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리 말라는 투로 좌중을 훑어보더니 돌연 나를 향해 내뱉었다. “내가 언제 너한테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어?”

상수의 갑작스러운 지적에 나는 영락없이 찌질이가 된 기분이었다. 엉거주춤 목을 길게 빼며 주뼛거리다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물었을 때 네가 끄덕인 고갯짓은 어떤 뜻이었어?” 그러자 상수는 찰떡 내밀자 꿀까지 발라준다는 식으로 냉큼 맞받았다.

“그야 오늘이 9. 28이니까. 너, 서울이 수복된 날도 몰라? 사실 9. 28은 상당히 뜻깊은 날이라고. 서울시로서는 축제를 열어도 될 만큼. 한데, 시민들은 대부분 이날의 중요성을 잘 모르는 것 같아. 내가 모이자고 한 건 바로 그 때문이야. 우리끼리라도, 이미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한 의식 있는 지성인들만이라도 자리를 만들어 같이 술 한잔 나누며 이날의 의의를 되새기고 기념하자고 말이야.”

그러고는 좌중을 둘러보더니 못을 박듯 덧붙였다.

“왜, 뭐가 잘못 됐어?”

# 졸업 후 나는 자연 나꼼수와는 멀어졌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할까. 그리고 그의 눈에는 요즘의 이 잘나가는 나꼼수가 어떻게 보일까.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