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듣기만 해도 가슴 벅차오르는 단어다. 유달리 우리 민족에겐 그러하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63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해방의 기쁨은 여전하다. 그러나 왠지 마음 한구석에는  해방의 참 기쁨이 없다. 그렇기에 진정한 해방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우리는 신앙인이기에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가 보자. 성경 역사에도 애굽에서 곤욕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4대 만에 출애굽사건을 통해 이루시니 곧 해방(解放)이자 자유(自由)다. 마치 일제 35년 통치에서 해방을 맞은 우리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출애굽기 19장의 시내산 언약을 통해 자유의 조건을 제시한다. 백성들은 그 언약을 지키지 못해 결국 가나안 정복의 몫은 그 후손에게 넘어간다. 그리고는 얼마 못 되어 열왕기상 11장에서처럼 솔로몬이 이방신을 섬김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치욕의 역사가 있게 되고, 급기야 이방 즉, 바벨론에 의해 70년간 다시 포로가 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마치 나라를 잃고 간도(間道)를 헤매며 일송정과 해란강을 오가며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던 선조들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결국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히 10:1)”라는 말씀과 같이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참 자유는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의미로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히 10:1)”고 하시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 자유는 바로 예수였음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 신앙인에게 있어 성경적 참 자유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율법대로 오신 예수가 자유의 참 형상이었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은혜와 평화로다’는 말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정리해 본다면 율법으론 죄를 해결할 수 없으며, 죄의 해결은 오직 예수로 말미암음이란 의미다. 즉, 자유라 함은 죄로부터의 자유이자 해방이었음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죄사함의 문제는 예수 초림으로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 아니요 재림이란 과정이 우리에겐 또 남아있음을 성경적으로 깨닫는 게 중요하다. 즉, 예수님과 우리가 맺은 새 언약이다.

그 새 언약은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니, 새 언약의 법이 마음에 새겨져야 비로소 죄가 사해짐을 알 수 있다. 즉, 하박국 선지자가 미리 말한 ‘걸어 다니는 성경’이며, 하나님의 법이 돌 판에 새겨졌던 것처럼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는 말씀이 응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새 언약이 이루어지는 때를 약속하시니, 예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시며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눅 22:16)”라고 하시는 것을 보아 십자가 사건으로 떠나가는 하나님 나라가 다시 임해올 때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바로 그 때가 유월절을 다시 먹는 때이니 곧 새 언약을 지키는 것이다. 그 때까지 우리에겐 진정한 영적 참 자유는 오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4~5)” 즉, 모든 사상이 하나님의 사상이 아니라 사단의 사상에 매인 바 되고 갇힌바 되어 있음을 잘 말해 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이다.

우리의 싸울 대상이 무엇인지 또, 그 결과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즉, 예수께서 이루시고 가신 영적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되어져야 할 때가 있음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간 부패한 영적 이스라엘이 바로 회복되어져야 할 나라임을 귀 있는 자는 들어 먹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自由와 光復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광(光)은 빛을 말한다. 빛은 말씀이요, 생명(요 1:4)이다. 그렇다면 잃었던 말씀을 다시 찾는 말씀회복이요, 광복임을 명심하자. 그리하여 하나님이 이루시는 영적 회복의 역사에 동참해 진리로 참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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