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삶 평생 이어와
아버지 심부름 자부심 돼
순국선열 추념탑 건립 앞장
1919년부터 일기 쓰신 父
봉오동·청산리 최전선 참전
다시 나라 찾겠다는 일념
바로 선 정신 이김의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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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학창시절 김원진 전 광복회 충북지부장이 어머니,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천지일보 2022.09.25

[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그 시절 일본군들하고 싸우는데 무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런 가난 속에서도 독립군이 생기고, 싸우고, 이겼던 단 하나의 이유는 나라를 다시 찾겠다는 정신이 마음에 바로 서 있었기 때문이죠.”

중국 만주에서 해방을 맞이했던 당시 김원진 전(前) 광복회 충북지부장의 나이는 12세였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 김창도 애국지사는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동료들과 한국으로 귀국했다. 여동생과 단둘이 서울까지 당도한 뒤에도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나라 없는 아픔을 겪어오면서 독립정신을 널리 알리는 데 평생을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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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김원진 전 지부장이 2020년 받은 대통령 훈장증. ⓒ천지일보 2022.09.25

6년간 광복회 충북지부장을 역임하면서 삼일공원 순국선열 추념탑을 세우고 국가공헌사업에 매진해 대통령 국가헌장도 받았다. 본지는 최근 김원진 전 지부장과 함께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함께 살펴봤다. 

다음은 김원진 前 지부장과의 일문일답.

- 유년기부터 ‘어린 독립군’ 역할 하셨다고.

1945년경 아버지 김창도 애국지사의 일기에 따르면 소학교 2학년인 아들 원진이를 안도에서 도문(만주에서 이어지는 철도 노선)을 지나 한국 땅 남양에 심부름을 보냈다. 어른들은 왜놈들의 검문이 심해서 갈 수가 없었다. 어린 자식을 위험한 심부름을 보냈다.

주위 어른들이 전부 독립군들인데 일을 시키더라. 삼엄한 경계 때문에 어른이 할 수 없는 일도 어린아이들이 심부름으로 할 수 있었다. 그때는 독립이 뭔지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했다. 계몽신문을 전달하고 각종 필요한 물품을 심부름으로 건네주고 했다. 그것이 독립운동이라고 얘기는 못 하겠다. 그냥 심부름한 것 아닌가.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모르면서도 시키면 시키는 대로 그대로 했던 게 하나의 자부심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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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23일 자택에서 모아둔 사진을 보여주는 김원진 전 지부장. ⓒ천지일보 2022.09.25

- 만주에서 서울까지 직접 걸어왔다고 하시던데.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 만주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평양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일본군을 피해 만주로 왔다. 아버지, 어머니, 누님과 동생들과 한집에 살았는데 12살 되던 해에 해방을 맞이한 거다. 그런데 아버지가 조금 먼저 귀국했다. 독립운동을 같이하던 동지들과 함께 먼저 한국으로 가셨다. 아버지가 떠나고 만주에 호열자(콜레라)가 돌아서 가족을 전부 잃었다. 어머니, 누님, 동생까지 잃은 뒤에 막막하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한국으로 들어왔다. 9살 난 동생 손을 잡고 기차 타고 걸어 오고 하면서 두 달 걸려 서울까지 왔다. 11월쯤 돼 무척 추웠다. 오는 길목에는 잘 때 남의 집 굴뚝을 안고 잤다. 먹는 건 걸어가다 남 밭 무나 고구마를 뽑아 먹었다. 무 뽑아 먹고 떫고 매워서 아주 혼이 났다. 

기차를 탈 땐 차표가 없으니까 기차 탄 어른들이 좌석 밑으로 숨겨줬다. 좌석 밑에서 사람 발에 차이면서 청진에서부터 연천까지 왔다.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하느냐’고들 묻는다. 편하게 지낸 시절이면 기억 못 할 거다. 정말 어렵게 생활했기 때문에 이렇게 아직 기억하고 있다.

- 서울에서 아버지와 만난 뒤 생활은.

아버지가 서울에서 군 생활하는 바람에 사실상 동생을 데리고 내가 벌어서 내가 살았다. 신문을 팔아먹고 살았다. 저녁에 공짜로 여러 장 받아서 팔고 다음 날 신문 받을 때 전날 신문값을 갚았다. 그렇게 하면서 대학까진 못 가도 야간 고등학교까지 나왔다. 고학(학비를 스스로 벎)으로 학교 다니고 대학 시험까지 합격했지만 생활비 때문에 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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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김원진 전 지부장의 청년기 사진들. ⓒ천지일보 2022.09.25

학교 갈 때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학교를 들어가려니까 호적이 없어서 입학 못 한다고 하더라. 재판해서 호적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재판을 해서 호적을 만들어 학교에 들어갔다. 호적이 없으니 따돌림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자식한테 자칫 재산을 물려주지 못할망정 호적도 없이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땐 정말 ‘죽기 아니면 살기’였고 모두가 그런 생활을 했으니까 고생이라고 생각도 안 했다.

- 그동안 행보와 아버지의 일기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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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김원진 전 지부장이 2012년 10월 충북도 순국선열 추념탑 건립 추진위원으로 위촉돼 위촉장을 받았다. ⓒ천지일보 2022.09.25

충북에서 광복회 지부장을 6년간 하면서 내 할 일을 해왔다. 지난 2012년에 삼일공원 순국선열 추념탑을 세우고 광복회관을 마련했다. 이제 내 나이가 85세가 됐는데 독립기념관 자료 위원이면서 탈북자들을 교육하고 있다. 예전엔 러시아, 중국, 일본에서도 역사강연을 했다. 한번은 일본 학생들을 데려다 놓고 일제강점기 시절 이야기를 했는데 학생들이 울더라. 

‘어떻게 우리 조상들이 그런 일을 저질렀나’ 하면서 눈물을 흘렸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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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아버지 김창도 애국지사가 1919년부터 1964년까지 기록한 일기 전문. 현재 원본은 부산역사 박물관에 기증돼 전시 중이다. ⓒ천지일보 2022.09.25

아버지는 우리나라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와 같은해 10월 청산리 전투 최전선에서 일했다. 그때부터 아버지가 일기를 쓰셨다. 1919년부터 1964년까지 기록된 그 일기를 부산역사 박물관에 기증했다.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면서 그처럼 일기를 쓴 분은 한 분밖에 없다. 지금은 현대문으로 바꾼 책으로 편찬되고 있다.

- 독립정신에 대해 한 말씀.

지금도 학생들에게 과거 우리나라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왜 독립군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얘기한다.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지금 젊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독립운동과 당시 사람들이 직접 겪었던 독립운동이 다르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순 없지 않나. 일본군과 싸우는데 무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 가난 속에서도 다시 나라를 찾겠다는 정신이 마음에 바로 서 있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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