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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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30~40여년 동안 주야장천 제창해 오던 한반도 비핵화는 드디어 종언을 고한 것 같다.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7차 회의에서 핵무력 정책을 법제화했다. 북한의 핵무력 정책의 법제화는 북한의 핵사용 독트린을 대외에 분명하게 선언한 것으로 핵보유국으로서 면모를 대내외에 과시한 것으로 결론 내릴 수 있다. 김정은 정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다.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고군분투한 한국과 미국의 대책은 그저 외교적 노력을 계속하겠다는 공허한 메아리가 전부였다. 북한은 미국과 한국을 보란 듯 기존의 핵 독트린이었던 ‘자위적 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데 대하여(2013년 4월)’를 폐기하고, 핵 선제사용 조건을 강조한 ‘핵무기 보유와 운용에 관한 법률(2022년 9월)’을 대내외에 공표한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시정연설을 통해 공표된 북한의 핵사용 독트린의 구체적인 내용은 북한의 최고인민회의가 채택한 11개 항에 잘 드러나고 있다. 11개 항목의 주요 내용은 ① 핵무력의 사명 ② 핵무력의 구성 ③ 핵무력에 대한 지휘통제 ④ 핵무기사용결정의 집행 ⑤ 핵무기의 사용원칙 ⑥ 핵무기의 사용조건 ⑦ 핵무력의 정상적인 동원태세 ⑧ 핵무기의 안전한 유지관리 및 보호 ⑨ 핵무력의 질량적 강화와 개선 ⑩ 전파방지 ⑪ 기타 문제에 관한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국체로 규정한 가운데 이를 다시 국책으로 법제화를 주장하고 있는 핵무기 사용 5대 조건은 ▲ 핵무기 또는 대량살상무기 공격이 감행됐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 국가지도부와 국가핵무력 지휘 기구에 대한 적대세력의 핵과 비핵공격이 감행되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 중요 전략대상물에 대한 치명적인 군사적 공격이 감행됐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 유사시 전쟁 확대와 장기화를 막고 전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작전상 불가피한 경우 ▲ 기타 국가의 존립과 인민의 생명 안전에 파국적인 위기를 초래하는 사태가 발생해 핵무기로 대응할 불가피한 상황이 조성되는 경우로 설정하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최고사령관의 유고까지 예상해 전략군 사령관의 핵무기 사용 명령권 등도 명시하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시정연설에서 “지구상에 핵무기가 존재하고 제국주의가 있는 한 핵을 보유할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국제사회의 비핵화 압박 정책에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번 북한의 핵무력 사용 법제화의 의미는 바이든 미 행정부와 한국 정부에 대한 경고성 메시지를 던짐과 동시에 국제사회의 북한 비핵화 정책의 의지를 꺾고 핵보유국 지위의 체계적 공고화를 위한 신호탄으로 분석할 수 있다. 북한 핵무력 사용 법제화의 정치적 함의를 다섯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미국이 러시아와 중국과 대립하는 상황을 틈타 한반도에서 신질서 메이커로서의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핵선제 공격용 조건을 설정함으로써 암묵적으로 남한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내재돼 있다. 둘째, 벼랑 끝에 선 김정은 체제의 정권 안보가 최우선 순위라는 점이다. 참수작전에 대한 두려움이 핵 선제타격이라는 공격성으로 표현되고 있다. 셋째, 한미동맹 이간이다. 비핵국가들이 핵보유국과 야합해 침략이나 공격행위에 가담하지 않는 한 핵위협이나 핵사용을 배제한다는 원칙으로 한미 연합 훈련을 강화하는 한국은 언제든지 북한의 대적 정책의 기조 하에 핵 선제공격의 대상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넷째, 핵사용 독트린을 대내외에 천명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비핵화 의지를 꺾고 대북제재 해제를 강압하기 위함이다. 동시에 북한 주민들의 불만을 상쇄하고 김정은 정권의 국방에 대한 업적 과시를 통해 내부 단결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북한의 핵무장은 커트 캠벨의 핵확산 주요 동기인 ‘체제 비관주의(regime pessimism)’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경제적·군사적 균형에서 열세인 나라일수록 절대무기인 핵무력화로 경쟁국 혹은 적대국에게 망각되거나 무시되는 것을 제어하려 한다는 것이다. 애당초 죽기살기로 핵개발에 매달려온 북한의 핵무력화 의지를 꺾겠다는 것 자체가 ‘공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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