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비호 출림(飛虎 出林)과 같았다. 시민운동가 박원순은 시민의 숲 속에 몸을 웅크린 비호였다. 출림의 기회가 포착되자 나는 호랑이처럼 기민하게 숲을 박차고 나왔다. 정당들은 쑥대밭이 되고 정치고수들은 혼비백산했다. 그는 삽시간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권력을 손에 거머쥐었다. ‘Ecce Homo!’ ‘에체이 호모!’ ‘이 사람을 보라!’ 빌라도가 가시 면류관이 씌워진 예수를 가리키며 운집한 군중에게 이렇게 외쳤다. 그때의 상황은 아니지만 가시 면류관 대신 시장 당선의 영광을 안은 그가 온 나라의 시선을 한몸에 모은 것은 틀림없다. 모두가 그를 주시하고 있다.

그의 출현은 질풍노도(Sturm und Drang)와도 같았다. 그 기세로 정치권을 강타해 거의 가사 상태에 몰아넣었다. 그 여파로 정치 무림(武林)엔 새로운 풍운이 소용돌이 치며 피어오른다. 그는 그 풍운의 중심인물이다. 그는 정말 큰 시험대에 섰다. 그는 경기장의 심판 같은 입장에서 그라운드의 스타플레이어로 변신했다.

그 같은 변신을 보는 시각은 엇갈릴 수 있지만 시민운동가라고 해서 정치가 절대적인 금기 사항은 아닐 것이다. 그가 누구든 진정 국중(國中)의 재목이라면 어디에 숨어 있든 찾아내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역량을 발휘하게 하는 것은 나쁠 것이 없다. 그는 정치인의 길을 자원했으며 성공적으로 그 길에 진출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서울 시정을 책임지는 행정가가 됐으며 동시에 야권 연대의 중심인물인 정치인이 돼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파당의 한쪽 편에 서게 된 순수한 자연인이 아닌 정치인으로서 이제 다시 중립적인 시민운동가의 자리로는 되돌아가기 어렵다. 그에겐 퇴로가 없다. 지금 서 있는 행정가, 정치인으로서의 현장이 그의 무덤이 되든, 영광의 자리가 되든 그는 여기서 최선을 다해야 된다.

그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지만 이는 그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과 시민이 스스로의 권익을 위해 공복(公僕)인 그에게 요구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이며 바람이다. 그는 시험대에 섰지만 국민과 시민은 정치 경험이 없는 신인을 뽑아 막중한 사명을 부여함으로써 모험적인 정치 실험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국민과 시민은 그들의 삶의 질의 향상과 행복의 증진을 위해 그가 성공적으로 진력해줄 것을 기대하며 그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국민과 시민의 입장에서 이 중대한 정치 실험이 헛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가 최선을 다해주어야 할 이유가 분명한 것이다.

정치 현장은 몸 가누기조차 힘든 난장판이다. 그에게 힘을 실어줄 우군도 있지만 적대 세력도 있다. 꿈과 뜻은 클지 모르지만 현장 경험이 없는 아마추어가 그런 곳에 뒤섞였으니 그가 받는 기대만큼이나 우려가 높은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매 순간 말과 행보에 쏟아지는 날카롭고 매서운 검증의 눈초리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그가 숙련(熟練)되기를 기다려주는 여론의 톨레랑스(Tolerance)와 밀월의 시간이라는 것은 결코 길게 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그를 정치판에 대표선수로 내보낸 시민운동 세력들은 누구보다도 더 가슴을 졸일 사람들일 것 같다.

그는 시민운동 세력의 힘과 조직력을 추동력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때문에 그의 영광과 굴욕은 그가 겪는 그대로 시민운동 세력에게도 고스란히 빛과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며 공진(共振)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그렇지만 그 같은 어쩌면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적인 불가분의 관계가 지속되는 것은 상생(相生)의 길이 아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들썩이지 말고 본연의 건강한 비판세력으로 돌아가 외양간을 잘 지켜야 한다. 시민운동 세력이 지나치게 편향된 정치적 각(角)을 세우고 정치화하는 것을 많은 국민은 원치 않는다. 그것이 시민운동가가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것을 경지장의 심판이 주전 플레이어가 되는 것만큼이나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박원순의 당선은 분노한 표심의 결실이다. 야권의 공당들이 독자적인 후보를 내려 하지 않고 시민운동가인 그와 연합한 희한한 정치 공학도 시민들의 분노가 없었으면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민들의 분노는 민생 현안과 높아지는 국민의 복지 요구에 있어 집권 정부와 여당은 물론 정치권 전체가 보인 무성의와 무능, 무대책 때문에 유발됐다.

이 같은 시민의 분노의 표심, 응징의 표심이 그에게 쏠려 그를 당선시켰던 것이지 그가 틀림없이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시민들을 인도할 능력자라는 전적인 확신 때문만은 아니었다. 솔직히 우리는 그가 서울 시정(市政)과 시민을 어디로 끌고 가려는 것인지, 서울을 어떤 도시로 만들어 놓을 것인지 아직은 확실한 신뢰가 없다. 또한 각광받는 정치인으로서 대한민국의 정치 판도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어떻든 그는 운도 있었고 민심을 기민하게 읽어낼 수도 있었다. 이렇게 볼 때 그는 정치인으로 데뷔는 늦었지만 정치 소양만은 이미 충분히 갖추고 있었던 사람 같다. 그 같은 소양을 바탕으로 그가 국민과 시민을 위해 기량(器量)을 발휘하고 믿음을 쌓는 것은 지금부터의 숙제가 될 것이다.

분노의 표심을 유발한 민생 현안은 더 말할 것 없이 총량적인 경제성과가 대다수 국민의 후생에 도움이 안 되는 데서 기인한다. 소수의 수혜자를 제외하면 대다수 국민은 소득이 느는 것이 아니라 빚만 부푼다. 도심 재개발은 돈 있는 사람들을 위한 잔치에 불과하지 영세민들의 주택난과 전세난을 덜어주진 못하고 있다. 그들은 집시나 유목민처럼 자꾸 생활환경이 열악한 변두리로 쫓겨나 유랑한다. 마치 1930년대 미국 대공황 때의 피폐한 민생과 사회모순을 고발한 존 슈타인백(John Steinbeck)의 소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에 나오는 조우드(Joad) 일가를 비롯한 경작지를 빼앗기고 떠도는 소작인들 같다. 포도송이 같은 민중인 이들의 마음속에 분노가 들끓고 익어갈 것은 자명하다.

이들에게는 국가의 정의로운 손길의 개입이 불가피하고 절실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박원순을 당선시킨 것은 높은 투표율 때문이기도 하다. 그 역시 주로 꿈과 희망을 잃은 젊은 층의 분노에 의해 견인됐다. 높은 등록금을 내고도 대학을 나와 취업을 못 하는 청년들, 취업해 월급을 받아도 정직하게는 내 집을 마련할 꿈도 꿀 수 없는 젊은 부부들, 생활비 교육비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시기에 직장에서 퇴출되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과 수많은 비정규직이 그들이다.

이처럼 선거는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들추어 보여주고 우리에게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또 우리에게 경고한다. 박원순에 쏠린 분노의 표심은 더더욱 그러했다. 박원순 서울 시장 당선자 자신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일거일동과 언행, 공복으로서의 성실성은 항상 주목의 대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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