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스포츠 칼럼니스트·스포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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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대유행이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는다. 우리나라 감염자수가 매일 10만명 대에서 줄어들지 않고 있고, 중증환자 숫자가 수백명 대에 계속 머물러 있다.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으면 대개 독감 정도로 지나치는 경우가 많지만 기저질환을 가진 이들은 죽음과 사투를 벌여야 할 정도로 큰 어려움을 겪는다.

지난 주 야구기자출신 후배 2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두 사람 다 60대 초반의 나이로 기저질환이 아니었으면 삶을 더 구가할 수 있었기에 아쉬움이 컸다. 공교롭게도 후배들은 오래전부터 암투병을 해왔고, 2년 전 코로나19 발병 이후 비교적 건강을 잘 유지해오다 최근 병세가 악화됐다는 공통점을 보였다. 또 필자와는 모두 같은 스포츠신문사에서 근무한 인연을 갖고 있다.

한 후배는 박찬호가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을 때, 국내 처음으로 미국 야구 특파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1990년대 중반, 미국 특파원하면 대개 워싱턴이나 LA 특파원을 얘기하던 때였다. 그는 야구기자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를 전담하기 위해 파견됐다. 박찬호의 소속팀인 LA 다저스를 주로 취재하기 위해 LA에 기반을 두고 홈경기와 원정 경기 등을 따라 다녔다. 박찬호가 등판하는 날에 그의 기사는 스포츠 신문 1면을 항상 장식하곤 했다.

뛰어난 영어 실력을 갖추고 있던 그는 박찬호와 LA 다저스 선수들뿐 아니라 MLB 관계자 등을 취재해 한국 야구팬들에게 미국 야구의 진면목을 잘 알게 해주었다. 그와는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 같은 신문사 선후배로 취재를 간 적이 있었다. 당시 방콕아시안게임은 야구에서 박찬호의 병역 면제여부가 최대 관심사였다. 한국야구가 우승을 차지하면 박찬호는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병역 면제를 받아 메이저리그에서 군 공백 없이 계속 뛸 수 있었다.

미국 야구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박찬호와 가깝게 지낸 후배는 방콕아시안게임에서 박찬호의 병역 면제가 확정될 때, 마치 자기 일인냥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IMF 경제 위기로 국민들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박찬호가 미국에서 승리를 전하며 큰 활력을 불어넣어주기 때문이었다.

그는 메이저리그에서 박찬호가 성공하는 모습을 지켜본 뒤 7년여간의 특파원 임무를 마치고 귀국해 스포츠 신문 편집국장의 중책을 맡았다.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매일 이어지는 신문 제작의 고단함이 원인이었는지 위암 판정을 받았다. 암수술을 성공적으로 받고 일상 업무로 복귀한 그는 전문성을 인정받아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에 오르기도 했다. 2년여간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자신의 천직인 야구 기자로 복귀한 그는 인터넷 매체 대표이사를 맡으면서도 현장성 높은 칼럼을 계속 연재했다.

또 다른 후배는 원래는 필자와 경쟁 관계에 있던 스포츠 신문의 야구기자였다. 1999년 같이 창간한 스포츠 신문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만났다. 그는 메이저리그보다는 국내 프로야구에 정통한 야구기자였다. 대구 출신으로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썼던 그는 고향팀인 삼성을 비롯해 여러 팀에 가깝게 지낸 선수와 코칭 스태프들이 많았다. 주로 발로 뛰며 생생한 현장 기사를 많이 발굴해냈다. 그는 야구 부장과 편집국장을 거친 뒤 퇴직 이후 췌장암이 발견돼 수술을 받은 뒤 오랫동안 치료와 관리를 해 왔다.

야구 기자로 이름을 날렸던 두 후배들의 빈소에는 많은 전현 야구인들이 다녀갔다고 한다. 그들이 얼마나 야구기자로서 충실한 삶을 보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까운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난 후배들의 명복을 빈다. 두 후배는 일간스포츠 편집국장 출신 장윤호, 스포츠투데이 편집국장 출신 임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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