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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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당황스러웠다. 명색이 정권교체로 새 정부를 출범시킨 윤석열 대통령의 100일 기자회견이었다. 물론 평생 검사로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정치권에 진출해서 단박에 대통령까지 됐으니 국정 전반에 대한 이해도는 당연히 낮을 것이다. 무지하고 서툴고 현실에 대한 이해도마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기성의 낡은 정치에 물들지 않은 참신함은 인정하고 싶었다. 혹여 잘 못한 것이 있다면 이런저런 변명이나 궤변에 능한 정상배들의 모습과는 달리, 곧바로 인정하고 태도를 바꿀 수 있는 담백함도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근거 없이 순진했던 기대는 윤 대통령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보면서 산산이 깨져버렸다. 솔직한 심정은 지금의 절망을 넘어서, 앞으로의 5년이 더 걱정됐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모두발언 19분, 질의응답에 29분이 소요됐다. 모두발언의 대부분은 지난 100일간 추진된 국정성과를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그러나 모두발언은 공감하기 어려운 국정성과를 나열했으며, 질의응답은 알맹이 없는 원론적 답변이 더 많았다. 이날 윤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이나 탈원전 정책과 같은 ‘잘못된 경제정책’을 폐기했다고 자찬했다. 모든 정책은 그 가치에 따라 양면성이 있기 마련이다. 당장 국민의 인기가 없다고 해서 잘못된 정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특히 윤 대통령은 부동산 시장의 하향 안정세를 국정 성과로 꼽았다. 하지만 윤 정부의 첫 부동산 정책은 100일 기자회견 하루 전날에야 나왔다(8.16대책). 따라서 윤 정부가 지난 100일 동안 내놓은 뚜렷한 부동산 정책은 없다.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 등은 부동산 정책이 아니다. 경기가 극도로 나빠지는 시점에서 ‘부동산 버블’이 꺼지고 있을 뿐이다. 이것을 지난 100일의 성과라고 말하는 것은 코미디에 다름 아니다. 모르고 말했다면 정말 무지한 것이고, 알고도 그랬다면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모두발언에서 향후 5년을 읽을 수 있는 국정 청사진은 한마디로 맹탕에 가까웠다. 공허한 개념의 남발과 구체성 없는 원론적 표현, 미래를 향한 설계가 아니라 대통령의 ‘다짐’ 정도에 그쳤다. 그렇게 ‘국민’을 강조하면서도 취임 100일 만에 국정운영 지지율이 20%대로 무너졌지만, 정작 국민을 향한 사과나 혁신 의지도 없었다. 국민의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겠다고 했지만 국민 대부분이 등을 돌린 여론조사 결과는 아예 무시해버렸다. 국민을 바보로 보지 않는다면 국민을 그렇게 싸구려 취급할 일이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외 메시지는 더 초라했다.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을 향해서는 느닷없이 ‘담대한 구상’이라며 비핵화 이후 대북 경제지원을 언급했다. 이것은 이미 폐기된 하나마나한 얘기이며, 그마저도 이명박 정부의 ‘비핵 개방 3000’의 아류에 다름 아니다. 이것을 ‘담대한’이라는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까지 했다. 현실성도, 방향성도, 새로움도 없는 얘기를 내놓은 것이다. 그러자 북한은 윤 대통령 취임 100일 기자회견 직전에 미사일 두 발로 화답했다. 사실상 조롱을 한 셈이다. 북한의 이런 반응을 보고 나서도 윤 대통령은 이날 모두발언에서 또 반복했다. 미사일보다 더 무서운 것은 북한이 이러한 윤 정부를 얼마나 우습게 볼 지가 솔직히 더 마음에 걸렸다.

윤석열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을 향해 1998년의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역사왜곡, 위안부, 강제징용 등의 얘기는 빼버렸다. 그 대신 미래로 함께 가는 ‘이웃’으로 표현했다. 이것은 한일 관계 현실에 눈을 감은 채 일본의 비위를 맞추려는 굴신에 가깝다. 당연히 일본 언론에서는 긍정적인 평가 일색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오늘의 일본은 김대중-오부치 선언과는 거꾸로 가고 있다. 아베 이후의 자민당 정권은 극우 군사주의 노선을 노골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이 뜬금없이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언급한 것은 정말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격이다.

아니나 다를까. 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가 있던 그날, 일본 정부는 2차대전 A급 전범이 모여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보란 듯이 참배했다. 기시다 총리는 공물을 봉납했다. 그리고 일본 정부의 이런 태도를 보면서도 윤 대통령은 이틀 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도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심지어 윤 대통령은 일본 기자의 강제징용 해법 질의에 대해 일본의 ‘주권’까지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한국 정부가 적절한 해법을 찾겠다고 했다. 그야말로 주객이 뒤바뀐, 아니 가해국과 피해국의 위치가 완전히 뒤바뀐 웃지못할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왜 우리가 일본의 주권까지 걱정해야 하며, 강제징용의 적절한 해법을 왜 피해국인 한국 정부가 마련해서 일본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말인가. 정작 우리의 주권을 무참하게 짓밟은 것은 일본이 아니란 말인가. 어쩌다가 대한민국의 오늘이 이렇게 가고 있는지 참으로 참담하고도 모욕적인 일이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지켜보면서 정말 앞으로가 더 걱정이었다. 외교와 안보는 물론 정치와 경제 등 내치까지 무엇하나 손에 잡히는 비전이나 가치를 찾기 어려웠다. 편견으로 채운 정파적 발언이 아니다. 심지어 일각에서 말하는 ‘각자도생’의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만나는 듯한 시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부에 대한 신뢰’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두렵다. 각자도생, 그것은 지금 대한민국이 가야할 길이 아니다. 상위 20%의 국민은 박수를 보낼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국민에겐 재앙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때를 노린 것일까. 우려했던 대로 다시 검찰이 전면에 나섰다. 전 정권의 안보, 북한 관계자들에 대한 자택 압수수색 소식이 전해졌다. 조만간 경찰이, 또 감사원이 더 거칠게 나올 것이다. 그렇게 또 그들끼리 싸우고 또 싸우면서 시간은 흘러갈 것이다. 이 땅에서 지식인으로, 시민으로 그리고 국민으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 고달픈 것인지 새삼 100년여 전 백성들의 피울음이 귓전을 떠나지 않는다. 각자도생, 진짜 운명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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