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삼 미술품 복원가ㆍ미술품 복원연구소 art C&R 소장
학창시절 강릉 주변 해변가에 놀러 갔다가 바위 곳곳에 빼곡히 쓰여진 낙서들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긁어서 만든 낙서도 있지만 작정하고 페인트를 준비해서 제대로 솜씨를 발휘한 것도 있었다. 그중에서 흰 페인트로 쓰여진 친구의 이름을 발견했다. 흔한 이름도 아니어서 친구한테 네 소행이지 하고 놀릴 양으로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

예로부터 입신양명(?)의 가르침 때문인지 몰라도 우리 국민들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에 유독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산에 올라가도 바위에 이름 남기기에 대한 열망은 그칠 줄을 모르고 해외여행이 빈번해지자 이제는 외국까지 그 맹위를 떨치고 있다. 에펠탑 꼭대기는 물론 유명 고딕성당의 구석까지 자랑스러운 우리의 한글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마침내 보호하고 보존해야 할 우리 문화재까지 자랑스러운 이름을 남기기에 이르렀다. 얼마 전 국보 147호인 울산의 천전리 각석에 친구의 이름을 쓴 한 고등학생이 검거되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또한 이 사건의 조사과정에서 근처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에도 누군가 이름을 쓴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문화재에 낙서나 훼손을 하는 행위를 반달리즘(vandalism)이라고 한다. 어원은 프랑스혁명 당시 혁명군에 의한 공화정의 문화파괴 행위를 과거 5세기경 반달족에 의한 유럽 침탈 행위와 비교한 한 사제의 비유에서 비롯되었다.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문화재에 대한 반달리즘이 만연되어 있는 실정이다. 정치적 목적이든 개인적인 일이든 기존 질서에 대한 반감의 표출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 문화재가 내포하고 있는 절대적인 가치를 이용하는 것이다.

탈레반에 의한 바미얀 석불의 파괴행위가 그랬던 것처럼 숭례문을 방화한 노인도 자기 집 현관에 분풀이하는 것보다 국보 1호라는 상징성이 있는 문화재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바로 그런 이유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가진 파괴행위가 아닌 단지 친구를 놀려주기 위한 장난의 대상으로 문화재를 선택했다는 데 오히려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우리 한민족에게 낙서 본능의 DNA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 철딱서니 없는 고등학생이 범죄행위의 단서가 될 친구의 이름을 낙서로 남긴 것은 그가 국보 문화재를 동네 담벼락 정도로 여기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가 없다. 더구나 낙서를 한 후 1년 후에야 사건이 알려졌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우리 사회가 문화재의 보존에 얼마나 무심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즈음 우리의 대중음악인 K-POP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주목받고 있으며 우리 문화와 우리말을 배우는 외국인의 숫자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우리 고유문화에도 미치게 될 텐데 만약 이들이 한국을 방문해서 산과 바다는 물론 국보급 문화재에도 적혀 있는 자랑스런 한글로 된 이름들과 낙서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심히 걱정이 되는 것은 비단 필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 국보 285호 반구대 암각화와 함께 울산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암각화 유물인 국보 147호 천전리 각석에 돌로 그린 듯한 낙서가 지난 8월 30일경 발견됐다. 낙서는 ‘이상’이라는 한글 두 글자로, 천전리 각석의 오른쪽 부위 기하학 무늬 바로 아래쪽에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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