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반군에 쫓기던 ‘영웅’은 배수로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그는 이내 끌려 나와 살기등등한 반군 전사들에게 봉변을 당한다. 주먹으로 피투성이가 되도록 험하게 얻어맞고 급기야는 애지중지하던 황금권총을 빼앗겼다. 우습게도 그 호신용 권총에 의해 그는 목숨을 잃는다. 자기를 지켜주지도 못할 황금 권총은 왜 허리에 차고 있었나. 그는 비명횡사했다. 그의 시신은 한 마리의 도축된 짐승처럼 어느 푸줏간 냉동 창고에 집어넣어져 구경거리로 전시됐다.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를 42년간 철권 통치한 ‘영웅’은 이렇게 일생을 마감했다. 이것이 그가 산 삶의 업보(業報)요 응보(應報)이긴 하지만 인간의 정의(Pathos)로는 측은(惻隱)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덧없고 허망하다. 당나라 시인 백낙천은 그의 시 ‘방언(放言, 나오는 대로 말함)’에서 이렇게 읊었다. 방언 중 몇 대목이다. 태산이라 해서 털끝처럼 작은 것을 함부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짧게 산 안자는 오래 산 팽조를 부러워하는 마음이 없다/ 소나무는 천년을 살지만 끝내는 썩고 말며/ 하루살이 무궁화는 그 하루를 스스로 영화로 만든다/ 그런데 어찌 세상일에 애착을 버리지 못하여 늘 죽음을 걱정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태산불요기호말(泰山不要欺毫末)/ 안자무심선노팽(顔子無心羨老彭)/ 송수천년종시후(松樹千年終是朽)/ 근화일일자위영(槿花一日自爲榮)/ 하수연세상우사(何須戀世常憂死)>. 백낙천의 이 시가 말해주듯 인생은 이렇게 ‘어느 날 아침 무궁화 꽃이 꾸는 잠시의 꿈(槿花一朝夢)’이거나 또는 ‘무궁화의 하루살이 영화(槿花一日榮)’와 같은 허무하고 무상한 것임에 틀림없다. 인생을 이렇게 읊어 설파한 백낙천은 필시 달관한 인생관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그의 시에서 허무주의가 집히긴 하지만 그것은 쇼펜하우어 류(類)의 비관에만 경도된 부정적인(Negative) 것이 아니라 니체의 ‘긍정적인 허무주의(Positive nihilism)’와 가깝다.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인정할 가치는 인정한다. 세상일에 억지스럽게 집착하는 일도 없고 그것이 부질없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죽음의 공포에 늘 떨지도 않는다. 그저 죽고 사는 것에 대해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고 편안하고 의연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현자(賢者)의 삶이요 군자의 삶 아닌가. 하루를 살아도 그 같은 달관의 경지로 산다면 그 삶은 행복하고 죽음은 아름답다. 사실 꼭 현자와 군자가 아니더라도 이름 없는 많은 사람들이 백낙천의 생각과 같이 그렇게 살다가 죽어갔다. 지금도 그 같은 의연함을 심중에 간직하며 살고 죽는 사람들이 많음을 우리는 안다.

이 같은 낙관적이며 능동적인 허무주의는 동시대와 후대의 타인과 세상에 위로와 위안이 되며 평안을 가져다준다. 그 같은 사람들의 족적은 우리를 가르치고 미망(迷妄)에서 우리를 깨운다. 그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감동의 선물이다.

‘왕 중 왕’이라던 카다피가 다급한 상황이었긴 했지만 살기 위해 더러운 고속도로 밑의 배수구에 사냥꾼에 쫓기던 짐승처럼 몸을 숨긴 것은 생전에 우쭐대던 영웅 행색으로 보아 얼른 실감이 안 간다. 중국 한(漢)나라의 무장이던 한신(韓信)이 젊었을 적 시정 불량배들의 협박에 못 이겨 그들의 가랑이 밑을 기어나가 보신(保身)을 꾀했던 일화가 풍기는 뉘앙스와는 본질에서 다르다.

카다피의 마지막 외침은 반군의 포위망 속에서 본능적으로 내뱉은 ‘쏘지 마라! 쏘지 마라!’였다. 그는 살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자리에서 죽으면 물론 아주 죽고, 설사 살아도 결국은 죽게 될 것이 분명한 질곡에서 삶을 구걸한 것은 그에게 영웅다운 분명한 사생관(死生觀)이 없었음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그는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가짜 영웅이었으며 미약한 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는 비장하게 목을 내놓는 것을 영예로 알았던 지나간 수많은 패장(敗將)들의 역사적 선례에서 배운 것이 없었던 것 같다.

죽음의 문턱에서 햄릿(Hamlet)과 같은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의 갈등이나 망설임마저 없이 살아남는 것을 선택했다면 그는 일개 사무라이만큼의 결기나 자기 결정력도 없었던 그저 그런 사람의 하나였다. 죽음이 초라하고 측은한데 생전에 누린 권세와 부귀공명, 영화는 무슨 소용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인가. 주검 앞에 가족들은 흩어져 모이지 않고 곡(哭)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그 쓸쓸함과 처량함이 의미하는 것은 뭔가. 카다피는 자연인으로서의 삶이나 역사적인 삶 모두를 망쳤다. 한마디로 패가망신했다. 그것이 인민을 억압한 오만과 군왕의 그것과 같은 군림하는 전제(專制)의 업보 아닌가. 카다피와 같은 1인 독재의 가짜 영웅은 자신과 세상 모두에 재앙을 가져다 줄 뿐이다.

인민 위에 군림하는 군왕이나 영웅호걸의 시대는 갔다. 지금은 역사철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sis Fukuyama)가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이라 일컫는 인류 역사 발전의 최후 단계인 자유민주주의(The liberal democracy)가 보편화된 시대다. 과거 군왕의 권력은 민(民)을 다스리고 지배하면 그만인 ‘신권(神權)’이었으나 민주주의 지도자의 권력은 국민을 하늘 같이 섬겨야 하는 권력이다. 그 권력 역시 모택동이 말한 대로 총구로부터 나오거나 카다피와 같이 쿠데타로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재민의 민이 기한을 정해 맡기는 것에 불과하다.

카다피는 이 같은 역사적인 대세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해 권력을 영구히 사유화하고 탐했다. 역사를 거스르는 자(者)는 카다피와 같이 망한다. 지금 시대에도 왕은 있다. 그렇지만 영국 일본의 경우와 같이 왕은 있으되 군림하지 않으며 정치권력과 권력 지형의 변화에 초연한 국가의 상징에 불과하다. 이 같은 시대에 카다피는 역사를 거슬러 과거 군왕과 같은 견제 없는 절대 권력자로 군림해오다 참변을 당했다. 사필귀정이다. 그럼에도 카다피의 전철(前轍)을 밟을 듯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순서를 기다리는 독재자들이 존재한다. 심지어 세습권력도 있다. 그들은 호랑이에 잡아 먹힐까봐 호랑이 등에서 못 내리는 사람들처럼 패가망신할까 봐 절대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오지를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카다피의 몰락이 그들을 더욱 신경과민으로 몰고 갈 것만은 불을 보듯 뻔하다.

백낙천이 말하는 대로 개인의 일생은 태산 같은 삶이나 털끝 같은 삶이나 같은 값을 지닌다. 고작 32년을 산 공자의 수제자 안자의 삶이나 800년을 산 팽조(彭朝)의 삶의 가치를 꼭 그 일생의 길이로 재단할 수는 없다. 결국 인생의 가치는 아름다운 죽음을 통해 드러난다. 아름다운 죽음은 적어도 그만큼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는 것을 웅변하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카다피의 삶과 죽음에서 얻는 역설적 교훈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