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때 개발한 ‘측우기’
가뭄·홍수 모두 있던 현종
수해 피해에 조세 감면도

image
2020년 2월 27일에 국보로 지정된 금영측우기(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출처: 문화재청)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115년 만에 수도권을 강타한 역대급 폭우로 곳곳에 피해가 이어지고 있다. 과학이 발달한 현대사회에도 갑자기 들이닥친 자연재해 앞에서는 모두가 속수무책이었다. 그렇다면 지금보다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의 조선시대에는 홍수를 어떻게 대했을까.

지난 8일부터 수도권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폭우가 시작됐다. 곳곳에 시간당 100㎜가 넘는 비가 쏟아졌고 일 강수량은 1920년 8월 2일에 기록한 354.7㎜를 뛰어넘은 381.5㎜를 기록했다. 특히 서울 동작구의 경우 지난 8일부터 9일 오후 8시까지 483㎜, 서초구는 447㎜를 기록했다. 이는 7월 전체 강수량인 252.3㎜를 뛰어넘는 수치였다.

◆ 세종 대, 호조의 건의로 시작된 측우기

조선시대에는 강우량을 조사하기 위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측우기’를 이용했다. 측우기는 세종 23(1441)년 호조의 건의로 시작됐다. 호조는 서운관에 대(臺)를 만들고 그 위에 길이 2척, 지름 8촌이 되는 그릇을 올려 강우량을 측정하자고 했다. 이어 마전교 서쪽과 한강변의 암석에 수량을 측정할 수 있는 푯말을 세워 도승(渡丞)에게 수량을 측정해 호조에 보고하게 했다. 이는 각 고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년 후 호조는 더욱 자세한 방안을 정해 건의했으며 세종이 이를 받아들여 전국적으로 측우기를 제작 및 설치하도록 했다.

하지만 측우기에 의해 강우량이 처음 기록된 것은 중종 37(1542)년에 이르렀을 때이다. 중종 37년 5월 29일의 기록에 “28일부터 이날까지 비가 내리기도 하고 개기도 했는데 측우기의 물을 잰 것은 5분(약 10.4㎜)이었다”라고 적혀있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기간에는 측우기 측정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영조에 다시 등장한다. 특히 정조 15(1791)년에는 측우기의 수심 측량 법식을 정했다는 기록도 나와 있으며 이후로도 측우기를 활용한 강수량 측정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측우기는 헌종 3(1837)년에 제작된 금영측우기(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이다. 일본으로 유출됐던 금영측우기는 1971년에 반환돼 현재 기상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2020년 2월 27일에 국보로 지정됐다.

image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중부 지방에 호우특보가 발효된 8일 서울 동작구 신대방 삼거리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성인 무릎 이상까지 물이 차올라 이동에 큰 불편을 겪고 있다. ⓒ천지일보 2022.08.08

◆ 유난히 수해가 많았던 현종

측우기로 측정한 강우량에 대한 기록은 중종실록에 처음 등장하지만 홍수에 대한 기록은 태조시기부터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홍수’라는 표현보다 큰비(大雨), 큰물(大水)이라는 표현도 많이 사용됐다. ‘세종실록’에 보면 “여러 날 동안 큰비가 내리니 수재가 있을 것이다. 수문의 전방을 속히 걷어치워 수도를 통하게 하고 순찰하는 관원과 병조에서는 밤새도록 순시하여 사람을 죽는데 이르게 하지 말라”는 기록에 ‘큰비’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 명종부터 현종까지 132년 동안 유난히 홍수가 많았다. 전체기간에 기록된 내용의 절반이 이 시기에 기록됐다. 이때는 홍수 피해도 전국적인 규모로 발생해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특히 조선시대 역대 왕 중 현종은 자연재해를 가장 많이 겪었다. 역대 최악의 가뭄이라는 경신대기근이 있었으며 홍수의 피해도 많이 입었다. 현종 2(1661)년 기록에는 “경상좌도에 큰물이 져 120여호가 침수되고 70여명이 죽었다. 언덕과 골짜기가 뒤바뀌고 개천의 물길이 달라졌으며 농토가 망가지고 곡식이 물에 잠기는 등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라고 적혀있다. 

◆ 백성들의 홍수 피해, 임금의 부덕 탓

조선시대에는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임금의 부덕으로 돌렸다. 이에 왕들은 민심을 다스리기 위해 왕의 개인 재산인 내탕금을 열어 수해 복구를 위한 지원금을 보내주거나 수해 입은 백성들에게는 조세 부담을 줄여줬다. 또 수해로 사망한 이들을 위한 제사를 나라에서 지내주는 경우도 있었다. 

정조 13(1789)년 7월 26일 기록에는 “물에 빠져 죽은 저 불쌍한 백성들에게는 그 원통함을 위로할 방법이 없다. (중략)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는 마을 근처에 따로 하나의 단(壇)을 설치해서 봉명 사행(奉命使行)이 도착하는 날을 기다려 제사를 지내 주도록 하라”고 적혀있다. 정조 16(1792)년에도 “공주목 옥천군에 홍수가 나 140여호가 잠기고 59인이 빠져 죽었다. 관에서 거두어 묻어주고 제사를 지내 위로하라고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홍수를 막지 못한 관직자에게 문책을 내렸으며 관직자 스스로 면직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자연재해와 함께 당파 갈등이 심했던 현종은 스스로 근신의 의미로 수라상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며 관리들에게 화목하게 협력할 것을 명하기도 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