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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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의 외교정책 핵심은 한미일 3국간의 협력을 강화하는 데 있다. 물론 오래된 방식이긴 하지만 윤 대통령은 특히 미국과의 강력한 동맹관계 구축에 사활을 걸고 있다. 지난 5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양국 관계를 끌어 올린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주저하지 않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 참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연장에서 일본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손을 내밀며 유화적 제스처를 보내고 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지난 18일 도쿄에서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을 만났다. 한일정상회담을 위한 물꼬를 트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일관계는 미국이 뒤에서 등을 떠민다고 해서 금세 어떤 결론이 나오기는 쉽지 않다. 일제 침략의 역사가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20세기 침략주의 역사는 대부분 마무리됐다. 오직 일본만이 예외다. 오늘 이 순간에도 욱일기를 앞세우며 ‘전쟁 가능 국가’를 꿈꾸는 일본이다. 극우 아베 전 총리의 죽음에 일본 국민도 고개를 숙이는 나라다. 아베의 죽음 이후 이틀 만에 치러진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는 집권 여당인 자민당이 압승했다. 반면에 침략을 당한 이웃 국가들의 피눈물에는 꿈쩍도 않는 유일한 나라가 일본이다. 심지어 억지와 궤변으로 역사까지 왜곡하며 침략주의적 만행을 정당화시키는, 세계에 단 하나뿐인 국가가 바로 일본이다.

문재인 정부인들 이웃인 일본과의 미래지향적 협력관계를 왜 원하지 않았겠는가. 글로벌 위상이나 경제수준에서 일본은 여전히 한국을 압도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인이라면 그 누구도 일본의 의중을 간과할 수 없다는 얘기다. 특히 북핵을 해소하고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서라도 일본의 도움은 절실하다. 그럼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단순히 역사왜곡이나 국민적 자존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침략주의적 태도를 견지하는 일본과는 더 이상의 협력관계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일 간의 대치는 그렇게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정권교체가 이뤄지고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자 한일관계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 든 것처럼 보인다. 일본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도 윤 대통령이 더 적극적이다. 자칫 굴욕과 배신을 뒤집어 쓸 수 있는데도 한일관계 복원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표출시켰다. 기대보다 우려하는 목소리가 더 많았던 배경일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박진 외교장관이 지난 18일 도쿄까지 가서 하야시 일본 외무상을 만난 것이다. 자칫 서두르다가 양국 현안에 대해 우리 정부의 입장을 후퇴시키는 것은 아닌지, 일본까지 가서 우리 국민의 자존심에 상처만 내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외교부가 밝힌 한일외교장관 회담의 결과는 충격적이다.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문제의 조기 해결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며 “강제징용 판결과 관련해 일본 기업의 국내자산 현금화가 이뤄지기 전에 바람직한 해결 방안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 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박 장관도 “강제징용을 비롯해 현안문제의 바람직한 해결 방안이 마련되면 자연스럽게 한일정상회담도 열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사법부 판단에도 불구하고 한일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우리 정부가 앞장서서 일본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뜻으로 들리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뒤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한일정상회담에 매달리는 듯한 언행도 참으로 보기 민망하다. 앞서 대법원은 2018년 10월과 11월에 각각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내용의 확정판결을 내렸다. 그럼에도 이들 피고 기업은 아직도 배상책임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대화조차 거부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오히려 한국 사법부의 결정을 비난하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조만간 대법원 결정에 따라 강제적인 자산매각을 위한 법적 절차가 이행될 예정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급한 쪽은 일본 정부와 피고 기업이다. 그럼에도 박진 장관이 일본까지 찾아가서 한국 정부가 해법을 찾아보겠다는 등의 저자세 외교를 펼친 셈이다.

윤석열 정부는 ‘민관 협의회’ 방식으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을 인정하고 사과부터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2015년 박근혜 정부 때의 ‘한일 위안부 합의’ 방식대로 처리하겠다는 것이라면 국민적 저항에 직면할 것임을 직시해야 한다. 윤 정부가 국민의 피눈물을 달래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우리 국민에 대한 2차 가해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일본 정부는 아무런 입장 변화가 없다. 물론 성의도 없다. 그런데도 한국만 달라진 입장으로 접근한다면 그 자체가 저자세요, 굴욕적이다. 우리가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이미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그 시점에 맞게 현금화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것이 부담스럽다면 우리가 아니라 일본 정부와 해당 기업이 바람직한 해결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가, 박진 외교장관이 일본까지 가서 한국 정부가 바람직한 해결 방안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한다는 말인가.

일본 정부에 선의를 기대했다면 무지한 것이다. 일본 정부에 합의를 구걸했다면 모욕적이다. 지난 25일 열린 대정부질문에서 박진 외교장관은 우리 국민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겼다. 한국 정부의 해법 제시가 한일정상회담 조기 성사를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말했다. 마치 일본 하야시 외무상의 주장을 듣는 듯했다. 이것이 현재 한일 외교의 현실이다. 이런 굴욕과 모욕을 우리 국민에게 뒤집어씌우면서 윤석열 정부가 얻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일제로부터 해방된 그날 이후 광복 77주년을 앞두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현실을 생각하면 부끄럽다 못해 참담한 심정을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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