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서예가’ 율산 리홍재 선생
‘타묵 퍼포먼스’로 정적인 서예를 동적 예술로 승화 평가
순수한 광대 모습 속에 세속적 욕심도 드러나 보여 신기
“‘말’이 있는 한 서예는 없어지지 않을 것… 많이 써 봐야”
서예엔 ‘한자교육’도 필수적… “쓰는 예술도 저절로 살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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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대구=송해인 기자] 율산 리홍재 선생이 그의 장기인 타묵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는 장면. ⓒ천지일보 2022.07.26

[천지일보=김성완 기자] ‘필가묵무(筆歌墨舞)’,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을 춘다. 어느 경지까지 이른 서예가의 글씨가 역동성이 있다는 뜻인데, 글씨가 그만큼 생명력이 있음을 나타내는 말일 게다.

서예가 ‘율산 리홍재’ 선생에게 서예는 춤이고 음악이고 스포츠다. 그는 글씨, 솜씨, 마음씨 같은 단어를 예로 들며 “씨가 핵인 글씨가 있고 이를 음률과 리듬에 맞게 풀어냈을 때 예술로써 서예가 된다”고 말했다. 마치 악보를 갖고 연주하면 살아 움직이는 음악이 되듯 서예도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에게 서예는 지극히 높고, 보이지 않은 세계까지를 담아내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종합예술이다. 붓의 움직임은 춤이 되고 거기에 리듬과 속도, 고저장단이 맞물리면 화선지에는 어느 샌가 생명이 담긴다.

이를 가장 잘 보여는 주는 게 그의 ‘타묵(打墨) 퍼포먼스’다. 타필비묵(打筆飛墨, 붓을 치니 먹이 난다)의 줄임말로, 타묵 퍼포먼스는 서예가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행위 예술임을 자처한다.

옛날에는 큰 붓, 큰 화선지가 없어 단지 못했을 뿐이라지만, 남의 것을 흉내 내는 게 아닌 끈질기게 내 것을 고집했던 결과물이다. 자신의 것을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세월을 고민했을지 상상조차 쉽지 않다.

커다란 붓을 장독 속의 먹물에 담갔다가 초대형 화선지에 춤을 추듯 온몸으로 써내려가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다만 서예계에서는 그의 이런 행위를 한동안 마뜩찮게 여기기도 했지만 대중들은 열광했다. 그의 역동성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정적인 서예를 동적인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평가가 쏟아진 이유다.

그는 끊임없이 ‘창조적 서예의 길’을 탐구하고 있다. ‘어렸을 때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시작했다’는 그는 “60여년을 해왔지만 아직도 하고 싶어 미치는 건 서예밖에 없다”면서 “새롭게 하고 싶은 것들도 무진장 많다. 또 무대가 없어서 서지 못할 뿐”이라고 말했다. 서예술을 향한 그의 열정에 감동을 넘어 경외심까지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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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대구=송해인 기자] 서예가 율산 리홍재 선생이 지난 19일 대구 봉사문화거리에 있는 그의 서도원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2.07.26

◆2000년 ‘타묵 퍼포먼스’로 대중에 눈도장

율산 리홍재 선생은 지난 1999년 대구에서 열린 봉산미술제 당시 전설로 회자되는 ‘타묵 퍼포먼스’로 대한민국 서예계에 눈도장을 찍었고, 이듬해인 2000년에는 안동 봉정사 초파일 야단법석에서 삭발을 하고 휘호하는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되면서 타묵 퍼포먼스 작가로 유명세를 탔다.

현재는 운명이 된 ‘타묵 퍼포먼스’ 덕분에 그의 이름도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는 등 주목을 받은 셈이다. 갈수록 그 범위도 넓어져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 스위스 등 해외에서도 초청됐다. 아울러 그의 새로운 시도는 전통의 틀에 묶여 있던 우리 서예가 다시 한 번 관심을 받는 계기도 됐다.

그는 60여년이라는 세월 동안 서예가의 삶을 살아왔다. 1982년 서울미술제 초대작가로 활동했고, 1996년에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국전심사 초대작가를 역임했다. 2000년과 2006년 미술대전 서예부문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을 거쳐 한국미술협회 이사, 대구서예대전 심사위원, 매일서예대전 초대작가회장을 지냈다. 현재는 한국정예작가협회 부회장, 국제서예가협회 이사를 맡고 있다.

이렇듯 그는 서예계 안팎에 깊은 인상을 남긴 한편, 서단에서도 자신만의 입지를 구축해 왔다. 그의 표현 가운데 특히 ‘가시밭길(난관) 극복’과 ‘창작의 희열’을 등치시킨 대목에 관심이 갔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성공이라는 욕구가 곁들여진 일종의 그의 내밀함이기도 했는데, 무슨 얘기냐면 ‘순수한 광대’ 느낌을 보여주다가도 세속적 욕망의 찌꺼기가 담긴 일반인의 태도도 그대로 드러내 그저 신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예에 푹 빠져있는 그에게 뒤따른 성공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다. 그가 걸어온 길의 당연한 한 단면일 수 있어 되려 좋았다.

“어려운 길 헤쳐 나가면서 사는 일, 즉 내가 하고 싶은 것 해서 성공했을 때 얼마나 좋겠나. 실제 내가 퍼포먼스하면 사람들이 많이 몰려든다. 누구나가 좋아한다. 대통령 취임식 퍼포먼스도 하고 신문 지상에도 실린다. 자긍심도 생기고 기분 좋은 일이다. 더군다나 서예의 폭을 넓히는 것과 동시에 대중들에게 알리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도 많이 받았다’는 그는 “부러우면 본인이 해보면 된다. 그렇게 써 내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스스로 깨우칠 수 있어야 한다”면서 “‘말’이 있는 한 서예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연필로든, 볼펜으로든, 늘 쓸 수 있기 때문인데 많이 써봐야 한다. 붓이 있다면 그걸로 쓰면 더 좋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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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대구=송해인 기자] 율산 리홍재 선생이 자신의 서도원에서 작업하고 있는 모습. ⓒ천지일보 2022.07.26

◆서예 세계화 맞물려 ‘K-캘리그라피’ 붐도

전통적 답습에서 벗어나 다양한 가치를 담아내고 있는 우리 서예가 세계화 시도와 더불어 오늘날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K-캘리그라피라는 새로운 영역으로의 확장성이 대표적인데, 이와 함께 서예가의 역할의 중요성 역시 부각되고 있다.

“캘리그라피 붐이 상당하다”는 율산 리홍재 선생은 “예쁜 글씨와 서예가 접목이 안 되고 있다”면서 “예쁜 글씨는 깊이가 없고, 서예가는 가볍다고 무시한다. 이를 조합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그랬을 때 옛스러움이 멋스러움으로, 일상에서 떨어진 먼 것에서 가까운 것으로 바뀌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자교육이 필수적이라고도 했다. 그는 “한자를 안 가르치니 뜻을 모른다. 바보가 됐다”면서 “한자를 통해 사고가 깊어지고 정신문화가 더욱 높아진다. 한글만 쓴다는 건 한손이나 한발만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이 경우 저절로 쓰는 예술도 살아난다는 게 그의 강조점이다.

또 “한자를 가르치지 않으면 중국, 일본을 이길 수가 없다. 한자가 어렵다고 하는데, 그러면 중국이나 일본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며 “더욱이 대한민국이 문화 강국으로 세계에서 우뚝 서게 하려면 그래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교육과정에서 서예가 한축을 담당해야 한다는 목소리와도 궤를 같이한다.

그의 서예를 향한 열정과 사랑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실제로도 대부분의 시간을 작품 활동에 할애한다. 물론 유명세가 있어서인지 각종 방송출연 등 섭외도 잦은 편이다. 인터뷰를 한 당일(19일)에도 계속되는 전화 연결음에다 그의 공간을 찾는 서예 관련 관계자들의 발걸음이 적지 않았다.

‘도심명산장(道心名山藏)’이라는 현판이 걸린 그의 서도원은 대구 봉산문화거리 어느 자락에 위치해 있었고, 문턱을 넘어서자 종이와 먹물이 어우러진 싫지 않은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여기저기 작업의 흔적과 함께 그의 작품이 공간 곳곳을 채웠고, 책장에는 서예에 관한 서적이 빽빽했다. 그의 전시 작품 100여점을 모아놓은 ‘명품전-율산 리홍재 60년’이라는 책도 자신의 묵필을 담아 내어준다

그의 창작은 머무름이나 안주함이 아닌 파중(破中)에서 나온다. 끝없이 나 자신을 깨뜨리고 나오는 작업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 모든 건 3으로 끝난다고 본다. 크냐 작냐, 잘하냐 못하냐. 그런데 중간은 안 보인다. 나라는 중심은 항상 있기 때문이다. 중간은 항상 있으니깐 얘기하지 않는다. 대소, 상하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없는 나만의 글씨를 쓰려면 앞이든, 뒤든, 자신과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삶이, 세상이, 우주가 보이는 게 서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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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대구=송해인 기자] 서예가 율산 리홍재 선생이 지난 19일 대구 봉사문화거리에 있는 그의 서도원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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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묵 퍼포먼스. ⓒ천지일보 2022.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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