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우리나라 구한말(조선 말기~대한제국 시기로)에는 서당, 향교, 사학, 성균관 등이 전통적으로 학교로서의 기능을 대신해 교육을 해왔는데, 이때는 대부분이 남성들만 교육하고 여성에게는 배움의 기회가 없었다.
이는 1876년 강화도 불평등 조약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 서양문물이 유입되고 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교육에도 본격적인 변화의 바람이 일어났다. 서당에서도 외국인 기독교 선교사들의 신식교육 영향을 받아 한학뿐 아니라 영어까지 필수과목으로 가르치는 등 다양한 교육을 했다. 그러면서 서당에 개방의 문이 열렸다.
여성의 교육 진출은 1886년 이화학당이 세워지면서 활발해졌다. 이화학당은 메리 스크랜튼이 세운 최초의 사립 여자 교육기관으로 고종황제가 외아문을 통해 교명과 현판을 하사했을 정도로 임금도 여성의 교육 진출을 반기고 장려했던 것이다. 1886년 5월 31일 고관집 소실 김부인이라는 여인이 첫 학생으로 입학 후 1887년 학생이 7명으로 늘어나자 명성황후는 스크랜튼 부인의 노고를 치하하며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지어줬다.
1898년에는 초·중등 과정의 근대여학교인 배화학당이 여자선교사인 조세핀 필 캠벨에 세워져 여성의 교육열기는 점점 더 확대됐다. 1900년대에 들어서는 서당도 많이 개방되면서 여학생들도 함께 듣게 되고 인원도 대폭 늘었다. 일제 치하에서는 서당이 초등교육뿐 아니라 민족교육까지 가르치는 등 개량서당으로 바뀌어 항일정신도 심었다. 이에 일제는 1918년 서당교육을 감독하고 통제하는 ‘서당규칙’을 제정했다. 그럼에도 전국적으로 서당이 점점 많아지자 1929년 서당규칙을 개정해 서당 설립을 인가제로 바꾸며 사실상 더 이상 설립하지 못하게 하면서 서당은 점점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서당은 퇴색해 갔어도 학당 등이 생겨나면서 여학생들은 빠르게 늘었다. 이화학당 학생이 교사로도 아이들을 가르치는가 하면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이 같은 공간에서 교육을 받는 일도 있어 여성들에게 가로 막힌 벽이 허물어지고 교육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됐다.
본지가 공개하는 이번 사진을 통해 이 같은 변화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서당에서는 나이가 지긋한 훈장이 서양문물을 사용하는 모습, 젊은 훈장으로 바뀌어 가는 모습, 여성들의 교육의 장이 열려 가는 모습 등의 ‘구한말 교육의 변천사’를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