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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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시성 이백(李白)과 도사 오균(吳筠)은 좋은 친구였다. 이백은 그로부터 도가사상을 알게 돼 점차 깊이 빠져들었다. 이백을 당현종에게 추천한 사람도 오균이었다. 이백은 그 기쁨을 앙천대소출문거(仰天大笑出門去) 즉 하늘을 쳐다보고 크게 웃으며 대문을 나섰다고 표현했다. 현종은 궁중에 이원(梨園)을 조성하고 악대와 무녀들을 배치했다. 오균은 그들의 우두머리였다. 이백은 궁중에서 시를 지었고, 이구년(李龜年)은 곡을 지었다. 오균은 지휘자였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시인과 도사라도 결국은 황제의 노리개에 불과했다. 시인의 정신은 항상 자유를 추구한다. 점차 참을 수 없게 된 이백은 미치광이로 변했다. 맨정신으로는 시를 쓰지 못하자 술에 의존했다. 현종도 이러한 이백이 귀찮았다. 게다가 이백은 현종이 총애하는 양귀비와 고력사(高力士)에게도 무례했다. 그는 궁정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백은 산으로 돌아가겠다고 간청했다. 현종은 기다렸다는 듯 돈을 주고 궁에서 축출했다. 오균도 궁중에 염증을 느꼈다. 두 사람은 산동 노산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먼저 출발한 이백은 제남에서 북해천사(北海天師) 고여귀(高如貴)를 만나 도교에 입문했다.

불향금궐유(不向金闕游), 사위옥황객(思爲玉皇客).

다시 궁궐에서 놀던 생각은 하지 않고, 옥황상제의 손님이 될 생각만 하겠네.

노산에 도착한 이백은 백운동의 일출과 저녁노을을 바라봤다.

아석동해상(我昔東海上), 노산찬자하(嶗山餐紫霞).

친견안기생(親見安期生), 식조대여과(食棗大如瓜).

나는 옛날에 동해에 살다가, 노산에서는 붉은 노을을 먹고 살았지.

안기생을 만났을 때는, 오이만한 대추도 먹었다네.

소기취금액(所期就金液), 비보승운거(飛步升雲車).

원수부자천단상(愿隨夫子天壇上), 한여선인소락화(閑與仙人掃落花).

때가 되면 금액천을 마시고, 운거를 타고 날아가려나.

부자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 신선과 함께 떨어진 꽃을 쓸어야지.

도가는 태양은 노을의 과실, 노을은 태양의 정(精)이라고 생각한다. 노을을 먹고 산다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 1천년을 살았던 안기생(安期生)은 낭야 출신이다. 그가 낭야에 온 진시황에게 해상에는 신선이 살고 있으며, 불로장생약도 있다고 말했다. 진시황은 서복(徐福)에게 바다로 나가 신선을 데리고 오라고 명했다. 역사에는 소군(少君)이 동해에 떠돌다가 안기생을 만나 오이만한 대추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백도 안기생을 만나 오이만한 대추를 먹고 싶었다. 이백은 해변에 있는 태청궁으로 갔다. 오균은 도사들에게 구현금보(九弦琴譜)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이백이 도착하자 그동안 연습한 음악을 들려줬다. 하루는 오균이 반도봉(蟠桃峰)에 가서 술을 마시자고 권했다. 두 사람은 소나무가 화개(華蓋)처럼 위를 가린 커다란 바위에 올라앉았다. 솔바람과 파도 소리가 어울려 맑은 음악처럼 들렸다. 오균이 시 한 수를 짓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백은 술 한 잔을 마시고 곧바로 청평조(淸平調) 영반도봉(詠蟠桃峰)을 지었다. 태청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오균은 금을 타며 거기에 곡을 붙이고 태청궁 도사들에게 곡을 가르쳤다. 이백과 오균이 노산을 떠난 후에도 이 곡은 오랫동안 전해졌다. 도사들은 매일 새벽에 이 곡을 연주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이 곡은 보허(步虛)라는 이름으로 근대까지 내려왔다. 이백과 오균은 삼도오고송(三涂五苦頌)이라는 악보를 노산의 도사들에게 줬다. 노산의 도교음악은 지금까지 유명하지만 애석하게도 보허는 곡만 남고 가사는 잃어버렸다. 반도봉에 있는 태백석(太白石) 후대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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