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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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아마도 2026년 통일이라는 설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민족의 복합적인 내전 상황을 녹인 스페인 원작을 살펴볼 때, 남북 간의 상황에 적용하는 착상을 할 수 있을 법했다. 그런데 갑자기 남북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고, 화폐도 같이 사용하는 근 미래(2025년)를 못박고 있다. 누가 이런 남북통일을 이렇게 낭만적으로 생각한단 말인가. 오히려 그 반대인 상황이다. 그 때문에 도쿄(전종서)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상황의 설명은 동의도 공감도 어려웠다. 그나마 1편을 넘으면 이러한 설정이 덜 주목받기 때문에 예민함이 둔감해졌다. 더구나 전반적인 설정과 연출의 테크닉은 ‘오징어 게임’ 수준에도 훨씬 미치지 못했다. 스톡홀름 증후군의 정서는 이미 신파라 폄하되는 한국적 정서에도 비교할 바가 안 된다. 물론 아시아권 일부에서 반응이 있을 수 있다. 이 정도에 관한 갈증과 결핍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애써 왜 스페인의 원작을 한국판으로 만들 이유가 있을까 싶다. 오리지널 콘텐츠의 중요성을 그동안 반복해서 강조해왔다. 물론 해외 원작을 다시 리메이크하는 방식은 외연의 확장을 위해 필요하지만, 그 원칙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첫 번째는 추세와 현실성의 균형이 맞지 않았다. ‘종이의 집’ 리메이크 제안은 2018년에 이뤄졌다. 이 당시는 남북관계가 급진전 되고 뭔가 새로운 변혁이 이뤄질 듯싶었다. 이 때문에 아마도 제작진은 남북통일의 설정도 생각을 한 듯 싶다. 이런 추세에 맞게 통일의 문제점도 지적한다면 비판적 인식도 가능해 사회적 가치도 있어 보였겠다. 하지만,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한국인들이라면, 대부분 인식하고 있다. 더구나 그 시간적 배경이 2025년이기 때문에 동의와 공감은 어렵다. 정권은 교체됐고 남북관계는 보는 대로 퇴행했다. 영화 ‘강철비’ 시리즈가 왜 외면받았는지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종이의 집’은 이런 설정을 되돌리지 않았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처음에 이런 공감과 동의가 없다면 몰입도는 떨어진다. 만약 이 작품이 차라리 SF였다면, 현실성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사건과 에피소드의 전개가 아니라 세계관의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오징어 게임’을 이미 인상 깊게 본 수용자들이라면, ‘종이의 집’의 설정이 밋밋하게 느껴질 것이다. 더구나 ‘오징어 게임’이 스페인 원작보다 더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더 기대했다. 하지만 ‘종이의 집’ 연출자는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이 아니다. 차라리 ‘오징어 게임’보다 먼저 선을 보였다면 선방은 했을 수 있다. 영화나 방송 드라마도 그렇지만 글로벌 OTT에서도 편성의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서바이벌의 강력한 자극을 과연 대치의 두뇌 게임을 이길 수 있을까. 더구나 이미 노출된 지략게임이다.

세 번째, 글로벌 OTT의 특징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 예컨대 장르적 특성이 매우 강한 측면이 잘 보이지 않는다. 겉으로 ‘케이퍼 무비(도둑질 영화)’라지만 오히려 인질 협상극에 가깝다. 스릴러 드라마인지 액션물인지도 불분명하다. 이런 경우 핵심적인 마니아층이나 열성 팬을 갖추기 쉽지 않다. 글로벌 OTT 이전의 드라마 연출과 편집, 내러티브 전개와 구성을 온존시키고 있었다. 이는 원작의 후광 효과에 따라 매우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기존 원작의 팬이지만, ‘종이의 집’ 팬덤은 어차피 이탈할 것이다.

네 번째, 이제 해외 화제작 리메이크는 트렌디 하지 않다. 해외의 화제작을 국내에서 리메이크해 성공한 드라마가 거의 없다. 수용자들은 사실상 그런 작품을 한국에 바라지도 않는다. K 스타일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바란다고 해도 박찬욱식으로 만드는 방법이 K 콘텐츠 스타일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의미와 가능성이 있는 작품의 얼개를 바탕으로 새로운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드는 방식이다. 물론 대중성과 보편성을 얻으려는 노력은 더욱 필요하다.

만약 남북관계 설정으로 하지 않았다면, ‘종이의 집’이라는 원작 드라마가 없었다면 국내에서는 열광했을지 모른다. 몇 년 전에 말이다. 아니면 현재도 최소한 남북관계가 잘 되고 있었던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했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교수(유지태)가 돈 4조원을 찍어 훔쳐내려는 의도와 목적은 우리의 삶과 정말 무슨 관련이 있을까. 우리는 그냥 돈 4조원을 한 개인에게 몰아주기를 더 선호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것에 안타까움과 슬픔이 있다. 그런데 ‘종이의 집’에서는 조폐창을 터는 쪽이나 이를 제압하려는 쪽이나 공동의 선을 위해 성실하다. 세상은 공동의 선에 집착할수록 파국을 맞는 역설 속에 노출되기 쉽다. 남북관계를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K 콘텐츠가 힘을 잃고 있듯이 자본주의 구조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개인들의 삶을 자본을 둘러싼 개별 욕망의 관점에서 투영시키지 않는다면, 엄혹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어떤 생산적인 담론 이전에 감흥도 일으키지 못한다. 거시 담론을 감내하기에 글로벌 위기 상황은 개인들에게 공포감을 가중하고 있는 때이다. 제작진은 파트 2를 기대하라고 했다. 인물들 간의 사건 전개가 더욱 긴박하거나 반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관계 설정의 한계는 벗어날 수 없다. 남북통일의 한계와 모순을 일깨우려 하기보다 그 반대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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