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머무는 詩] 사슴 - 노천명

2020-11-19     천지일보

사슴

노천명(1911~1957)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시평]

노천명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여류시인이다. 1938년에 시집 ‘산호림(珊瑚林)’이 나오자 당시 모더니즘이니, 생명파니, 초현실주의니 하며 시끄럽던 문단에서 여성적 독특한 시적 향기를 지닌 자신만의 목소리를 지닌 시인으로, 시단에 우뚝하게 자리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슴’은 바로 이 첫 시집에 실린 작품이다.

노천명이 시를 쓰고 발표하던 시기는 참으로 지난(至難)의 역사였다. 일제 강점기는 물론, 음흉한 일제는 지식인들에게 친일을 강요했고, 36년간의 아픔을 딛고 광복이 된 조국은 두 동강이 났는가 하면, 동족 간의 전쟁이라는 6.25의 비극, 그리고는 이념적 갈등으로 서로가 서로를 질시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민족적 비극이 점철됐던 시기이다. 노천명은 이와 같은 시기를 온몸으로 겪으며, 때로는 식민지의 한 지식인으로, 때로는 일제에 협력하는 굴욕과 함께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광복 이후 사상적 갈등과 함께, 나약한 여성이지만 전쟁의 비극을 그대로 겪기도 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라고 노래하므로, 사슴의 대명사가 된 이 구절은 고고한 긴 목과 슬픔을 동시에 지닌 지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노천명 자신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향기로운 관(冠)과 함께 무척이나 높은 족속이었을 것이라는 자아에의 기억, 그렇지만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야 하는 오늘을 사는, 슬픈 모가지를 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 해방공간, 그리고 남북으로 갈리는 아픔, 6.25 전쟁 등으로 점철되는 우리 현대사를 힘겹게 살아가는, 그렇지만 순수함을 잃지 않으려는 시인의 정신을 아프게 만나는 작품이다.  

윤석산(尹錫山)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