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사설] 또 반복된 ‘응급실 뺑뺑이’… 의료계 집단행동 멈춰야

2025-11-23     천지일보

지난달 부산에서 경련 증세를 보인 고등학생이 응급실을 찾지 못한 채 구급차 안에서 숨진 사건은 한국 의료시스템의 취약한 현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119구급대와 구급상황관리센터가 무려 14차례나 병원에 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온 대답은 “소아 진료 불가” “수용 곤란”이었다. 신고 접수 후 1시간 20분이 지나 15번째 병원에서야 수용됐을 때는 이미 심정지 상태였다.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이 병상 거부 속에서 허망하게 흘러간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학생이 고등학생, 즉 성인에 가까운 연령이었음에도 ‘소아 환자’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는 사실이다. 환자의 나이보다 진료과 분류와 책임 회피가 우선한 것이다.

병원의 진료 역량에 한계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응급의료의 기본 원칙은 단 하나다. “살릴 수 있는 생명은 최우선으로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은 그 원칙이 현장에서 얼마나 취약하게 적용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도 의료계는 최근 국회를 통과한 ‘응급실 뺑뺑이 방지법’마저 “의료 현장을 무시한 입법”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응급실에서 환자를 거부할 수 있는 사유를 엄격화하고, 부당한 거부 시 책임을 묻겠다는 내용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다.

환자가 1시간 넘게 응급실 문턱에서 생사를 오간 비극이 벌어졌는데도 의료계의 반응은 여전히 제도 개선보다 ‘기득권 방어’가 먼저다.

문제는 이 같은 모습이 이번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의대 정원 확대, 지역의사제 도입, 성분명 처방 등 정부의 의료정책이 나올 때마다 대한의사협회는 단체행동을 앞세워 대응해 왔다.

지난 1년 6개월간 의정 갈등을 이어간 끝에 가까스로 정상화됐던 의료체계는 또다시 파업 위기로 흔들리고 있다. 공공의료 확충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그 수단인 공공의대 설립은 반대하는 모순적 태도 역시 반복된다.

의사들이 정책에 반대할 자유는 있다. 하지만 그 반대가 환자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로 한 집단행동으로 이어진다면, 이는 전문가 집단으로서의 책임을 저버리는 일이다. 이번 부산 사고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환자를 중심에 두지 않는 의료체계, 그리고 문제 해결보다 이해관계 수호에 앞장서는 의료계의 오랜 구조적 문제가 만든 비극이다. 더 이상 같은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 국회·정부·의료계 모두 현실적 대안을 마련해 책임 있게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