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미디어아티스트 이이남 작가 “보이지 않는 세계, 빛·영상에 담아”
시간·기억·존재 흔적 화면에 어린시절 향수 작품에 투영 생활 속에서 예술 자료 수집 감성·철학 담은 회화로 평가 국경과 세대 잇는 공감 언어 무의식 속 경험 예술로 확장 ‘APEC’ 참여로 세계에 알려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세계적 미디어아티스트 이이남(Lee Lee Nam) 작가는 빛과 영상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려내며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왔다. 그는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일”이라며 시간과 기억, 존재의 흔적을 화면 위에 불러낸다. 단순한 기술의 결합이 아닌 감성과 철학을 담아낸 그의 작업은 확장된 회화로 평가된다.
이 작가는 “붓과 물감 대신 빛과 기술을 사용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인간의 감정이 흐른다”고 강조했다.
이 작가는 또 “기술이 감정을 비추는 순간 예술은 다시 인간의 언어로 살아난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전통과 현대, 현실과 가상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이며 단순한 시각적 경험을 넘어 국경과 세대를 잇는 공감의 언어로 확장되고 있다.
본지는 이 작가와 서면 인터뷰를 통해 예술의 사회적 역할, 기술과 감정의 관계, 그리고 고향의 기억이 작품에 어떻게 스며드는지에 대해 진솔하게 밝혔다.
◆삶 전체로 이어지는 창작의 흐름
이 작가는 생활 속에서 예술이 될 수 있는 소재를 수집하며 창작을 삶 전체에 이어지는 흐름으로 이해한다. 창작자의 마음을 가지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모든 사물과 감정이 하나의 재료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무의식 속 경험이 어느 순간 장면처럼 떠올라 작품이 되기도 한다.
현대미술을 그는 컨셉과 아이디어의 경쟁으로 본다. TV·잡지·인터넷 속 이미지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해 예술로 확장할 가능성을 늘 고민한다.
담양 출신인 이 작가는 작품 속에 고향의 자연과 정서를 깊이 담아낸다. 어릴 적 병풍산과 대나무 숲에서 가족과 함께했던 따뜻한 순간들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고향의 풍경은 달라졌다. 논과 밭이 있던 자리에 도시의 빌딩이 들어섰고 옛 터의 기억은 쓸쓸한 잔상처럼 남아 있다.
이 작가는 사라져가는 고향의 풍경이 이상향에 대한 그리움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향수를 일깨운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 자연과 빛에는 언제나 ‘고향의 온기’가 스며 있다.
◆움직임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작품
전통 회화와 디지털 매체의 결합은 이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이러한 융합의 출발점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학생들의 애니메이션 작업을 보며 새로운 동기를 얻었다”며 “정지된 조각과 달리 움직이는 이미지 속에서 작품이 살아 숨 쉬는 듯한 생명력을 체감했다”고 말했다.
이 작가는 다니엘 아라스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고민을 풀어냈다. 그는 “아라스가 ‘관람객이 단 5분이라도 작품 앞에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처럼 어떻게 하면 관객의 발걸음을 머물게 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해왔다”고 했다. 이어 이 작가는 미디어아트의 생명력에 대해 강조했다. “움직임이 가진 생동감은 예술의 문외한이라도 본능적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며 “이러한 힘이 세대와 문화를 넘어 갈등과 경계를 잇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디지털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미디어아트가 균형을 만들어내길 바란다”고 말했다.
◆혼돈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창조
이 작가의 대표작인 만화병풍, 묵죽도, 박연폭포에는 공통된 정서가 흐른다. 그는 원작의 고유한 힘이 진실인지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인지 고민했고 디지털로 재해석될 때에도 그 매력을 표현할 수 있을지 늘 궁금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작가는 전통 미술 역사 속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로 평가된다.
그는 “세상은 혼돈 속에서 창조됐듯 저의 행위 역시 새로운 탄생을 위한 의미 있는 접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원작과 함께 공존하는 것이 작업의 본질”이라며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했다.
◆동양적 감각 디지털로 재해석
이 작가에게 ‘한국적 미디어아트’는 단순히 전통 이미지를 디지털로 변환하는 기술적 시도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조선 회화와 불화의 미학에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 눈에 보이지 않는 기(氣)의 세계가 담겨 있다”며 “그 동양적 감각을 디지털로 재해석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적 미디어아트의 본질을 “기술이 아닌 정서”라고 정의하며 “빠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인간과 자연, 전통과 현대를 연결하는 감성의 회로를 만드는 것, 그것이 제가 추구하는 정체성”이라고 강조했다.
이 작가의 작업에는 불교적 사유도 스며 있다. 그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처럼 모든 존재는 형태를 가지지만 결국 비어 있음으로 돌아간다”며 “‘공(空)’은 소멸이 아니라 또 다른 생성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그의 영상 속 이미지는 사라졌다가 다시 태어나며 끊임없이 순환한다. 그는 이를 “무상의 세계를 시각화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관객 참여로 완성되는 예술
디지털기술의 발전은 이 작가의 작업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AI와 인터랙티브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그는 “기술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감각을 번역하는 언어로 본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술이 예술이 되는 순간은 인간의 감정과 교감할 때다. 관객의 참여로 작품이 완성되며 예술은 더 이상 작가의 일방적 표현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 작가는 “전시 공간을 단순한 기술 시연의 장소로 보지 않는다”며 “관람객이 작품 속에서 감정을 회복하는 경험을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빛 속을 거니는 이들이 잊고 지낸 감정과 고향의 냄새, 어린 시절 정서를 다시 떠올리길 바란다”며 “빛은 빠르게 움직이지만 그 속의 감정은 오래된 시간에서 온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익숙한 감정의 떨림이 일어나는 순간 작품이 비로소 완성된다”고 부연했다.
◆디지털 시대, 변하지 않는 본질 탐색
이 작가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예술가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드러내고 미래를 향한 메시지를 던지는 사람”이라며 “세상은 보이는 것에 집중하지만 예술가는 그 이면의 감정과 사유를 드러내야 한다. 한국 미디어아트도 기술적 성과를 넘어 감성과 철학을 품어야 세계적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창작 활동 20년을 지나 50대에 들어선 이 작가는 “팬데믹을 겪으며 이미지의 본질과 디지털 시대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탐구하고 싶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예술은 혼자 갇혀 하는 일이 아니라 삶과 사람 속에서 만들어진다”며 후배 예술가들에게 깊은 고민과 도전을 당부했다. 이 작가의 작업은 국경과 세대를 넘어 공감을 확장시키며 예술이 외교와 사회적 대화의 장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지난달 경주에서 열린 APEC 2025 정상회의 환영 만찬에 초청돼 한국 문화예술의 위상을 세계에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