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토 포기·군축”… 트럼프, 우크라에 새 종전안 ‘압박’
트럼프의 28개 조항 평화안 “돈바스 내주고, 나토 포기” “사실상 항복 요구” 비난 빗발 우크라, 러에 에이태큼스 타격
[천지일보=이솜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대규모 영토 양보와 군사력 축소를 요구하는 새로운 평화안 추진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러시아 고위 인사들이 비공식 채널을 통해 작성한 문건까지 드러나며 협상 압박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공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우크라이나와 유럽 정부들은 “사실상 항복안”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러한 외교적 압박 속에서도 우크라이나는 미국이 지원한 에이태큼스(ATACMS) 미사일을 처음 사용해 러시아 본토를 타격하고 러시아 역시 민간인 시설을 폭격하는 등 전선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19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과 가디언, 로이터 통신 등 주요 외신을 종합하면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달 가자지구 휴전 협상 때와 유사한 방식으로 28개 조항으로 구성된 구체적인 평화안 초안을 작성했다. 이 청사진은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스티브 위트코프 중동 특사,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가 러시아 측 특사인 키릴 드미트리예프와 협의해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초안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도네츠크·루한스크를 포함한 동부 돈바스 전역을 양도하고, 수년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가입을 포기하며 국제 평화유지군 배치를 포기하도록 규정했다.
평화안은 우크라이나 군대 규모를 절반으로 줄이고 특정 무기 사용을 제한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고 규정했다. 그 대가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나 다른 유럽 국가를 추가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입법화해야 한다.
로이터는 미국이 비공식적으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측에 “미국이 마련한 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신호”를 보냈다고 전했다. 또한 복수의 소식통은 여기에 우크라이나 군대 규모 축소까지 포함돼 있다고 로이터에 전했다.
우크라이나와 유럽 정부들은 “핵심 주권의 포기”라며 즉각 반대했다. 요한 바데풀 독일 외무장관은 “사안의 구체 내용을 통보받은 적이 없다”고 밝히며 우려를 표시했다.
루비오 장관은 비판이 커지자 SNS에 “지속 가능한 평화를 이루려면 양측이 어렵지만 필요한 양보에 동의해야 한다”며 “그래서 우리는 양측의 의견을 토대로 다양한 잠재적 아이디어 목록을 계속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러 모두 美 제안 거부
WSJ은 트럼프 대통령이 보좌진에게 “양측이 받아들일 만한 새로운 제안을 만들라”고 지시한 뒤 문건 작업이 급속히 진행됐다고 전했다.
미국 정부는 우크라이나가 재건 자금이 절실하고 러시아가 서방과의 경제 관계 회복을 원한다는 점을 활용해 합의 유인을 만들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의 입장 차는 여전히 크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포기와 점령지 철수 등 기존 요구를 굽히지 않고 있으며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새 진전은 없다”고 말했다. 마리아 자하로바 외교부 대변인 역시 “그런 수준의 합의 초안을 미국으로부터 전달받은 적 없다”고 선을 그었다.
러시아군은 최근 포크로우스크 등 동부 전선에서 공세를 강화하며 영토를 조금씩 넓히고 있다.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는 에너지 부문 부패 스캔들이 터지며 정치적 불안도 커졌다. 이런 상황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더 강한 양보 압박을 가하는 배경으로 지목된다.
현재 댄 드리스콜 미 육군 장관이 이끄는 고위급 대표단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방문해 국방부 장관 등과 전장 상황 및 잠재적 평화 회담에 대해 논의 중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올해 들어 직접 대화를 재개하지 못한 상태다. 지난 여름 이스탄불 회담 이후 양측 고위급 협상은 사실상 멈췄으며, 트럼프–푸틴 알래스카 회담 이후 거론된 3국(미국, 우크라이나, 러시아) 정상회담도 취소됐다.
미국이 새 평화안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지만 핵심 요구가 러시아 측에 크게 기울어 있다는 지적과 우크라이나의 거부 입장이 맞서면서 평화 협상은 여전히 불확실한 국면에 놓여 있다.
한편 트럼프 행정부는 협상과 함께 ‘압박을 통한 협상 환경 조성’ 전략을 병행하고 있다.
WSJ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18일 미국이 제공한 장거리 전술미사일 에이태큼스로 러시아 영토를 타격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장거리 미사일 사용 금지를 해제한 뒤 처음으로 확인된 공격이다.
러시아 국방부는 보로네시 지역에서 에이태큼스 4발을 격추했다고 밝혔으며 파편으로 인해 진료소와 고아원 지붕이 파손됐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군은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위한 결단적 진전”이라고 발표했다.
같은 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서부 테르노필의 아파트 단지를 미사일로 공격해 어린이 3명을 포함해 최소 25명이 사망하고 73명이 부상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