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평론] 핵 잠수함 한국에서 만든다
박상병 시사평론가
지난달 말 경주 APEC 기간에 이뤄진 한미 정상회담은 예상보다 성과가 많았다. 매우 다행이긴 하지만 당초 트럼프 행정부의 가공할 관세 압박은 사실 큰 부담이었다. 일각에서는 ‘약탈’이란 말이 나왔다. 자칫 외환위기가 재발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이런 상황에서 내놓은 한미 정상회담 결론은 나름 선방이었다. 관세를 비롯해 투자금과 이익 배분 그리고 투자의 로드맵까지 비교적 꼼꼼하게 설계해 놓았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이 공개 요청한 핵추진 잠수함(핵 잠수함)에 대해서 트럼프 대통령이 즉시 승낙한 대목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리도 핵 잠수함을 가질 날이 머지않았다는 낯선 전망이 쏟아졌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실 확인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사이 혹 미국 입장이 바뀌는 것은 아닌지, 세부 내용에서 엉뚱한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있었다.
그로부터 보름 뒤인 14일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팩트시트의 주요 내용을 발표했다. 엄중하게 접근하고 꼼꼼하게 설계한 흔적이 곳곳에 담겨 있다. 투자금 이익도 절반씩 나누기로 했다. 투자 대상도 추상적이긴 하지만 나름 합리적인 틀을 갖췄다. 그럼에도 불공정하고 빼앗긴다는 느낌이 여전히 강하지만 법은 없고 힘이 말해주는 국제사회의 생리를 안다면 그런대로 선방한 셈이다.
그중에서도 핵 잠수함 문제는 단박에 시선을 끌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한미 양국은 이번 협상을 통해 한국의 수십년 숙원이자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지키기 위한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추진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한미 양국이 공개한 팩트시트를 보면 핵 잠수함 건조에 미국이 승인하고 연료 조달 방안 등은 한국과 긴밀히 협력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원론적이고 그 표현도 추상적이다. 트럼프 대통령 말대로 미국 필리 조선소에서 건조하는 것인지, 원자로는 누가 어디서 만들 것인지 등의 내용은 없다. 미국으로부터 받을 핵연료에 대한 세부 내용도 없다. 핵 잠수함이 팩트시트에 적시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후속 협상이 더 치열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지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앞으로 우리 정부는 시간을 앞당기려고 노력할 것이며 반면에 미국은 최대한 시간을 늦추면서 뭔가를 받아 내려고 할 것이다. 게다가 미국의 정권이 바뀌면 입장이 또 바뀔 수도 있다. 키를 쥐고 있는 쪽은 미국이기 때문이다.
핵 잠수함 협상을 이끈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의 설명은 좀 더 전향적이다. 위 실장은 핵 잠수함은 처음부터 한국에서 건조하는 것을 전제로 협상했다고 밝혔다. 팩트시트에는 없지만 한국에서 건조한다는 점을 미국도 알고 있기에 미국 필리 조선소 등의 얘기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원자로도 우리 기술로 제작할 것으로 보인다. 설명대로면 한국은 핵 잠수함 보유는 물론 건조까지 하는 나라가 된다. 그동안 우려됐던 미국의 과도한 개입이나 번거로운 절차, 고비용, 기술 확보의 한계 등은 상당 부분 털어낼 수 있게 됐다. 그리고 핵 잠수함 건조로 인한 파생적 이익은 기대 이상일 것이다. 외교와 안보를 비롯해 경제, 산업 등 각 부문에 걸쳐 일종의 ‘게임 체인저’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대신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도 적지 않다. 당장 방위비가 대폭 인상될 수밖에 없다. 이번에 방위비를 GDP 대비 3.5%로 증액한다는 내용도 그 연장선에 있다. 더욱이 한국의 핵 잠수함 건조를 빌미로 각국의 군비경쟁이 더 불을 뿜을 것이다.
우리는 그만큼의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일본도 보다 적극적으로 핵 잠수함 건조에 나설 것이다. 이를 통해 기존의 ‘비핵 3원칙’도 흔들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반발도 풀어야 할 과제지만 무엇보다 북한의 핵기술 고도화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비핵화 프로젝트도 새로운 국면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대북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한반도 주변부터 핵무기 경쟁으로 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대목에선 미국과 중국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언제까지 선의만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다.
군 당국의 설명은 2030년대 중반 이후 5000t급 이상 핵 잠수함 4척 이상을 건조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소형 원자로 기술을 비롯해 핵 잠수함 건조에 필요한 제반 기술도 대부분 갖추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과의 후속 협의만 잘 이뤄진다면 10년 후엔 우리 기술로 만든 핵 잠수함이 우리 영해를 누빌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한미 원자력협정을 개정하는 문제부터 조속히 나서야 한다. 핵무장이 아니라 핵연료를 평화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는 점도 명확히 해야 한다. 개정이 어렵다면 별도의 협정도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미국 의회를 설득할 수 있으며 법적, 기술적 협력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핵 잠수함이 마냥 옳다는 뜻은 아니다. 얻는 것만큼 잃는 것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핵 잠수함 건조에 나서는 것은 갈수록 불안정한 국제 정세에 대비하는 선제적 조치의 의미가 크다. 사실 주한미군의 미래는 장담하기 어렵다. 언제까지 미국에 의존할 수도 없는 일이다. 천문학적 규모의 방위비 협상은 지속가능성이 낮다. 이 대통령이 전시작전권 전환에 나서는 배경이기도 하다.
향후 미·중 관계 등 동북아 정세가 더 불안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갑자기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될 수도 있으며 거기서 어떤 합의가 나올지도 예상하기 어렵다. 다만 우리는 최선을 기대하지만 동시에 최악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핵 잠수함은 그 연장선에서 우리 안보에 유용하다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