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문화칼럼] 외세 눈치 자유 억지 말아야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7세기 후반 나라가 송두리째 대륙에 지배당할 위기가 있었다. 그것은 당나라가 고종과 신라 문무왕 간의 약속을 파기하고 백제 구토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 지배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
신라는 통일대업에 도움을 준 우방 당나라에 선전포고를 한다. 바로 10여년에 걸친 대당투쟁이었다. 당시 대륙의 최강 당나라황제에게 반기를 든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고구려가 패망한 이후의 전쟁은 한강을 중심으로 한 당나라와 신라와의 치열한 접전으로 일관됐다.
여러 전쟁에서 당군은 피해가 컸다. 분노한 당 측천무후는 평양에 주둔한 말갈 유장 이근행에게 신라 왕경 정벌을 엄명한다. 당시 평양에는 이근행이 지휘하는 약 4만명의 기병이 있었는데 여기에 글안군과 본국 병력을 합해 20만 대군으로 편성했다. 이 같은 대 병력은 백제 공벌시나 고구려 침공 때보다 큰 규모였다.
이근행의 대병은 대부분 기병으로 일시에 한강을 넘어 죽령을 거쳐 신라왕경으로 내려간다는 계획이었다. 문무왕을 잡아 당나라 수도로 데리고 간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지금도 대한민국은 친중, 친미로 국론이 갈리고 있지만 당시에도 반당, 친당으로 나눠져 분열됐다. 문무왕은 당연합군을 막기 위해 구군(九軍, 구서당)을 총동원, 지금의 연천에서 배수진을 친다.
당시 신라 병력은 백제 공벌 시 동원 전력인 5만 대군으로 상정되고 있다. 문무왕은 이미 망한 백제, 고구려 패전 병력까지 참전토록 배려했다. 이들에게 구복장을 착용토록 했다.
한반도에서 우리민족이 외세 침공에 대비, 통합군을 만들어 대항한 첫 민족사적 항전이라 할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에는 당연합군은 대패하고 신라군은 수만 필의 전마를 노획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전쟁의 소상한 기록은 없다. 구당서에도 패전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국내 사정으로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만주 요양으로 철수시켰다고만 돼 있다.
이 전쟁의 승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민족의 숙원이었던 진정한 통일 한반도를 이룩하게 됐으며 세계 최강의 군대마저도 신라를 정복할 수 없다는 강인함을 알린 것이다. 당나라와는 이후 3백여년 평화를 유지했으며 발전 된 문화를 전수받는 계기를 만들었다.
중국대륙은 역사적으로 한반도와 뗄 수 없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2천년 역사의 부침 속에 한반도는 많은 영향을 받았다. 불교문화 도입과 유학사상의 전래 등 학문적으로는 중국과 손절할 수가 없다. 임진전쟁 때는 수 많은 군사를 보내 나라가 망하면서까지 일본의 한반도 침공을 저지 했다.
중국 문화와 중국인들을 모두 적대시 할 이유는 없다. 올바른 것은 취하고 바르지 않은 것은 막으면 된다. 그런데 한국을 지금도 중국의 속국처럼 여기는 정치인들의 언동과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저해하려는 기도는 막아야 한다. 그런데 최근 민주당이 주도, 특정 국가의 사람을 차별 혐오하는 시위를 제한할 수 있는 개정 법안을 발의했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억지하려는 반 헌법적 발상이다.
지난 7월 말 중국 싱하이밍 대사가 한국의 반중 극우세력을 단속을 요구한 데다 대통령이 반중시위를 깽판이라 부르자 경찰이 반중시위를 못하게 하며 채증하고 중국대사관이 있는 골목으로 못 들어가게 했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억지 하려는 정치 시도는 즉각 중지해야 한다. 과거 신라도 대륙의 과욕이나 강요에는 국가적으로 막고 저항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