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家 75년 금기 붕괴, 희망퇴직 쓰나미
롯데칠성 창사 이래 첫 감원…LG생건·세븐일레븐 잇따라 내수침체·고정비 부담에 '생존 모드'…내년까지 지속 전망
[천지일보=양효선 기자] 유통업계가 ‘희망퇴직 도미노’에 휩싸였다. 롯데칠성음료는 창사 75년 만에 첫 구조조정에 나섰고 세븐일레븐은 2년 연속 감원을 단행했다. 정년연장 논의가 한창인데 35세 직원까지 퇴직 대상에 오르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의 민생 소비쿠폰이 대형마트를 제외하면서 이마트·롯데마트는 3분기 영업이익이 각각 7.6%, 85.1% 급감했다. ‘민생 회복’ 정책이 오히려 구조조정을 부채질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AI 도입 가속화로 2026년까지 유통업 고용 한파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12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롯데칠성음료는 오는 21일까지 만 45세 이상(1980년 이전 출생자) 및 근속 10년 이상 임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는다. 1950년 창립 이후 처음이다. 근속 15년 이상 직원에게는 기준급여 24개월치와 재취업 지원금 1000만원을 지급한다.
지난해 롯데칠성의 영업이익은 1849억원으로 전년 대비 12.2% 줄었고 순이익은 600억원으로 64% 급감했다. 코로나19 이후 내수 소비 위축과 원가 부담이 실적을 짓눌렀다. 같은 그룹 계열사인 롯데웰푸드도 지난 4월 창사 이래 첫 희망퇴직을 시행했다.
편의점 세븐일레븐 운영사 코리아세븐은 2년 연속 희망퇴직에 나섰다. 2020년 85억원 영업손실을 시작으로 2023년엔 적자가 551억원까지 불어났다.
LG생활건강은 지난달 만 35세 이상 면세점·백화점 판촉직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았다. 올해 2분기 뷰티 사업에서 163억원의 영업손실을 내며 지난해 4분기 이후 20년 6개월 만에 적자를 기록한 직후다.
업황 악화가 가장 심각한 면세업계의 구조조정 강도는 더욱 높다. 현대면세점은 지난 4월 서울 시내 면세점 폐점과 함께 5년 차인 2021년 12월 이전 입사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단행했다. 근속 6년 이상 직원에게 성과 연봉 기준 12~15개월치를 지급했다.
신라면세점도 같은 시기 비공개 희망퇴직을 시행하며 ‘즉시 퇴직 시 연봉의 1.5배’ 또는 ‘18개월 휴직 후 퇴직’ 방식 중 선택 가능한 옵션을 제공했다. 호텔신라 면세점 부문은 지난해 연결기준 영업손실 757억원을 기록하며 적자전환했다.
롯데면세점은 지난해 8월 만 43세 이상, 근속 10년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통상임금 32개월치와 재취업 지원금 2000만원을 제시했다.
이커머스와 대형마트 역시 구조조정 대열에 합류했다. 11번가는 지난 9월 희망퇴직을 넘어 정리해고라는 극약처방까지 동원했다. 2023년부터 근 2년간 여섯 차례의 구조조정을 단행하며 생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올해 2분기 11번가의 영업손실은 102억원으로 전년 동기(-183억원) 대비 44.2% 감소했다.
기업회생절차에 돌입한 홈플러스는 지난 3월 수백 명의 희망퇴직자를 받고 위로금 명목으로 100억원 이상을 지출했다. 사모펀드 MBK파트너스가 보유한 홈플러스는 현재 매각을 추진 중이다.
이마트는 지난해에만 두 차례 희망퇴직을 단행했다. 두 번째엔 대리·사원급까지 대상을 넓히며 월 기본급의 20~40개월치를 지급했다. 자회사 SSG닷컴도 지난해 7월 법인 출범 이후 최초로 근속 2년 이상 본사 직원에 대해 최대 월급여 24개월치 특별퇴직금을 지급하는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이재명 정부는 ‘민생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내걸고 소비 진작을 위한 각종 정책을 추진해왔다. 대표적으로 민생회복 소비쿠폰을 대규모로 살포했지만, 정작 대형마트는 사용처에서 제외됐다. 가맹점 중심의 편의점은 대부분 포함됐지만 직영점 중심의 대형마트는 혜택을 받지 못하면서 장보기 수요가 전통시장과 편의점으로 이동했다.
이마트는 지난 11일 3분기 실적 발표에서 별도 기준 매출이 4조 5939억원, 영업이익은 1135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7%, 7.6% 감소했다고 밝혔다. 매출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할인점 부문 영업이익은 548억원으로 지난해 3분기(693억원) 대비 21% 급감했다.
롯데마트·슈퍼는 올해 3분기 국내 사업 영업이익이 71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85.1% 감소했다.
업계에서는 정부의 민생 회복 정책이 실제 유통 현장에서는 오히려 ‘역차별’로 작용하며 대형마트의 구조조정을 부채질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통기업들이 정리해고 대신 희망퇴직을 택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근로기준법상 정리해고는 긴박한 경영상 필요성이 인정돼야 하고 해고 회피 노력을 증명해야 한다. 최소 50일 전 노조에 통보·협의해야 하며 법적·사회적 리스크가 크다.
대규모 정리해고가 장기 파업과 손해배상 소송으로 번진 경험이 대기업들을 더욱 신중하게 만들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희망퇴직 보상 수준은 과거보다 훨씬 높아졌다. 업계 평균은 약 3년치 임금 수준이고 최대 4억~5억원의 위로금에 자녀 학자금까지 포함된 파격 조건을 제시하는 사례도 있다.
그러나 지원율은 높지 않다. 거액의 위로금을 받더라도 업황 자체가 좋지 않아 재취업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2026년 전망에서 인구구조 변화와 낮은 경제성장세로 취업자 수 증가폭이 올해 15만명에서 내년 11만명 정도로 축소될 것으로 내다봤다.
유통업계에서는 인공지능(AI) 도입이 가속화되면서 일부 업무 공정이 축소되고, 이에 따라 희망퇴직 기조가 2026년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희망퇴직의 배경은 전반적인 소비 위축과 오프라인 침체, 온라인 주춤이 맞물린 것”이라며 “기업들이 미래 성장이 어렵다고 판단해 인건비 절감에 나서고 있지만, 고급 인력의 대량 퇴직이 소비 감소를 부추기고 이는 다시 기업 실적 악화와 추가 구조조정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우려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