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탐방] 종묘의 ‘왕릉 뷰’ 논란

2025-11-09     천지일보

박희제 언론인

서울 종묘의 유산 보존 및 개발 규제 논란을 접하면서 불현듯 포르투갈 제2의 도시 포르투가 떠올랐다. 포르투는 지난주 결혼한 조카의 신혼여행지인 데다 필자가 오래전 취재 차 가보았던 역사적인 항구도시다. 15세기 대항해시대를 연 이 도시의 여러 건축물과 유적들은 종묘처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구도심 강변 구역인 리베이라를 필두로 세라 두 피라르수도원, 포르투대성당, 가이아 와인셀러, 돔 루이스 1세 다리 등 1000년 도시 발달 역사가 서린 유산들이다. 

이들 중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불리는 ‘리브레리아 렐루(1906년 개점)’가 인상 깊었다. 전차가 지나다니면서 중세 시대 양식의 도로 블록이 깔린 세계문화유산 구역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서점에 들어서면 곡선형 목조 계단, 스테인드글라스 천장, 고딕풍 목재 패널 등 볼거리가 빼어나다. ‘해리 포터’의 저자 J.K 롤링이 포르투에서 영어 교사를 하던 시절 자주 들렸던 곳이라 ‘해리 포터 서점’으로 더 알려져 있다. 포르투의 지적 전통을 상징하기에 긴 대기시간, 꽤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필수 방문지로 꼽힌다.  

1996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포르투에서 다양하게 추진된 보존‧복원 프로젝트 덕분에 도시 인지도가 올랐고, 국제 관광객 또한 크게 늘었다. 포르투와 같은 세계적 관광도시는 한결같이 도시의 기억과 시간이 쌓아놓은 입자들을 가치 있는 유산으로 대접한다. 개발 압력이 상당했음에도 낡은 것이라 천대하지 않고 역사 문화와 소통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잘 인지했기 때문이다.  

로마도 대표적 사례다. 1871년 이탈리아 통일 이후 로마제국 시절에 이어 다시 수도가 되면서 빠른 속도로 도시화됐다. 하지만 고대 로마 중심지의 포룸 로마눔,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 등 고대 유적을 중심으로 원도심 전역이 198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역사 경관 보존을 더욱 체계화했다. 마구잡이 철거와 재개발이 아니라 도시 구조를 헤치지 않으면서 도시 기능을 재활성하는 길을 택했다. 

이렇게 역사 문화가 살아 있어야 몸으로 도시를 체험할 수 있다. 벤야민은 도시 산책자가 누릴 수 있는 최대 기쁨을 ‘플라너리’라고 말했다. ‘도시를 배회하며 거리가 주는 풍경을 누리면서 뜻하지 않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도시가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일까. 사람들은 그런 도시를 기억하고, 다시 방문하고 싶어진다.

일본 대도시 중 도쿄보다 교토를 선호하는 관광객이 많은 게 같은 이치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도쿄로 수도를 옮겼지만 1100년간 수도였던 교토의 역사적 위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 전통 목조건축의 정수인 기요미즈데라(清水寺), 정원예술의 극치인 류안지(龍安寺),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축조한 니조성(二条城) 등 일본에서 가장 많은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도시다. 도시 곳곳에서 오래된 사찰, 신사가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한국 건축 미학을 대표하는 종묘는 국내 첫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유형유산인 데다 이곳에서 치러지는 종묘 제례는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이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종묘 정전의 본질은 시각적 아름다움에 있지 않다. 정전 앞 비운 공간이 주는 비물질의 아름다움은 가없이 넓은 사막의 고요나 천지창조 전의 침묵과 비교해야 한다”고 예찬했다. 현대 도시의 기능적 건축물이 아닌 영혼의 공간으로 비유한다. 세계 10대 문화유산으로 손꼽히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요르단의 페트라, 영국의 스톤헤지, 인도의 타지마할,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과 유사하다. 도시의 삭막함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치유의 힘’을 간직한 곳이다. 

이렇듯 성스러운 역사 유적에서 불과 180m 떨어진 ‘세운4 재개발구역’에 40층 높이의 ‘왕릉 뷰’ 초고층 건물이 들어선다면 종묘의 세계유산 가치를 훼손할 게 뻔하다. 재개발로 인해 항만 유산 가치를 상실한 영국 리버풀 해상무역 도시처럼 자칫 세계문화유산 등재 취소 가능성도 있다. 대법원이 유산 보존에 관한 개발 규제를 완화한 서울시 조례 개정이 유효하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유네스코 정신을 살릴 지혜로운 묘수를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