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수반도 당한 성추행… 주목받는 멕시코 여성폭력
첫 여성 대통령 성범죄 당해 길거리서 남성 취객이 추행 셰인바움 “여성들 위해 고소” 처벌 면제로 女 신고 꺼려해
[천지일보=이솜 기자] “대통령에게도 이 일이 발생했다면, 일반 여성들은 어떻겠습니까?”
멕시코의 첫 여성 국가수반인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대통령이 수도 한복판에서 성추행을 당한 사건이 전국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사건은 단 5분 거리의 도보 이동 중 발생했지만 이제는 멕시코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혐오와 일상적 폭력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번졌다.
5일(현지시간) AP,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셰인바움 대통령은 전날 멕시코시티 중심가의 역사지구에서 걸어가며 시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당시 촬영된 영상에는 한 중년 남성이 대통령에게 다가와 팔을 두르고 입을 맞추려 시도하는 모습이 담겼다. 셰인바움 대통령은 즉시 남성의 손을 밀쳐냈고 곧이어 수행원이 그 사이를 막아섰다. 영상 속 남성은 술에 취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경찰은 이날 밤 9시에 그를 체포했다.
사건 직후 셰인바움 대통령은 “만약 이런 일이 대통령에게조차 일어난다면, 우리나라의 젊은 여성들은 어떤 보호를 받을 수 있겠나”라며 분노를 표했다. 그는 “어떤 남성도 여성의 개인적 공간을 침해할 권리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이건 단지 내 경험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매일 겪는 일”이라며 고소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는 12살 때 통학 버스에서 성희롱을 당한 경험도 언급하며 “대통령이기 전에 한 명의 여성으로서 느끼는 현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고소하지 않는다면 다른 여성들은 어떻게 되겠나. 이번에는 반드시 선을 그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사건의 영상은 순식간에 SNS 전역으로 퍼졌고 일부 계정에서는 삭제됐지만 이미 수백만명이 공유했다. 많은 멕시코인들은 영상 속 장면을 ‘매일의 현실’이라며 분노를 표했다. 멕시코의 젊은 직장인 안드레아 곤살레스 마르티네스(27)는 AP에 “대중교통에서 이런 일을 자주 겪는다. 집까지 따라온 적도 있다”며 “이건 멕시코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의 동료 카르멘 말도나도 카스티요(43)도 “거리에서 자유롭게 걷는 건 불가능하다”라고 덧붙였다.
여성단체들은 이번 사건이 단지 개인적 공격이 아니라 ‘모든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고 규정했다. 클라라 브루가다 멕시코시티 시장은 “대통령에 대한 공격은 곧 모든 여성에 대한 공격”이라며 “더 이상 여성혐오가 관습 속에 숨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건 직후 보안 강화 여부를 묻는 질문에 셰인바움 대통령은 “우리는 국민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 방식을 바꿀 생각은 없다”라고 답했다. 그는 차량 이동을 피하고 도보로 이동한 이유에 대해 “20분의 교통 체증을 줄이기 위한 5분의 걸음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사건에 대한 현지 언론 대응은 논란을 불렀다. 셰인바움 대통령은 보수 언론 ‘레포르마’가 해당 장면을 사진으로 게재한 데 강하게 비판하며 “2차 피해를 초래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범죄”라며 “신문이 사과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연방 여성부도 성명을 내고 “여성 폭력을 목격하면 신고하라”면서 “언론은 여성의 존엄을 침해하는 이미지를 재생산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성추행범에 본보기 처벌 필요”
그럼에도 여성운동가들은 셰인바움 정부가 지금껏 여성폭력 문제에 미온적이었다고 지적한다. 후보 시절 그가 여성살해(femicide) 문제 해결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실질적 개선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해 멕시코에서는 여성살해가 821건이 보고됐고 올해 9월까지 이미 501건이 발생했다. 전문가들은 실제 수치가 훨씬 높다고 말한다.
멕시코 국가통계지리정보원(INEGI)이 2021년에 실시한 전국 조사에 따르면 15세 이상 멕시코 여성의 70.1%가 한 번 이상 폭력을 경험했으며 그중 49.1%는 성폭력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여성살해감시시민관측소의 아나 옐리 페레스는 로이터에 “이번 사건은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를 다시 국가 의제로 끌어올렸다”며 “매일 반복되는 여성폭력을 상징하는 사건이자 반드시 규탄돼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정치학자 마누엘 페레스 아기레는 AP에 “이번 사건은 명백한 폭력이며 가해자에게는 ‘본보기가 될 만한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셰인바움 대통령은 “성희롱은 법으로 처벌받아야 할 범죄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여성부에 각 주의 형법을 검토하도록 지시하며 “성희롱이 범죄로 규정된 곳은 전체 32개 주 중 절반뿐”이라고 밝혔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미주 지역 여성 3명 중 1명은 평생 한 번 이상 신체적 또는 성적 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다. 멕시코 내에서는 올해 들어 여성살해 건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0% 감소했지만, 전문가들은 여전히 70% 이상의 범죄가 처벌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페미니스트 단체 ‘게레로 여성폭력반대협회’의 마리나 레이나는 멕시코 여성이 겪는 폭력은 처벌 면제와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처벌 면제율이 70%가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여성이 범죄를 신고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남미 및 카리브해 경제 위원회(ECLAC)가 해당 지역의 여성살해에 관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4년까지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에콰도르, 온두라스, 페루, 우루과이에서 폭력을 경험한 여성 중 20~30%만이 국가 서비스를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