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포커스] 35년 대기업 홍보맨, 퇴직 후 공연으로 ‘인생 2막’
‘매일 공연 보는 남자’ 이종섭씨
공연 관람으로 채운 퇴직 일상
한편의 ‘뮤지컬’, 그의 삶 바꿔
무대 에너지, 그에게는 배터리
방황하는 50·60대에 새희망
“공연 통해 행복 전도사 꿈꿔”
책·강연으로 감동 나눌 계획
[천지일보=유영선 기자] “내 묘비명에는 이렇게 쓰고 싶어요. ‘반평생 공연을 즐기고 나누며 행복했어요. 안녕, 매일 공연 보는 남자.’”
삼성물산 홍보실에서 35년간 근무했던 이종섭(62)씨는 인터뷰 내내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을 “퇴직 후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의 인생 2막을 가득 채운 단어는 ‘공연’이었다. 연극, 발레, 오페라, 뮤지컬 등 무대 위 예술이 그의 하루를 빛나게 한다.
그의 공연 사랑은 단순한 취미 수준이 아니다. 공연 후 남긴 감상문이 쌓이면서 시작한 블로그는 어느새 누적 조회수 100만회를 돌파했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이지만, 저에겐 공연이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
◆ ‘영웅’ 한 편이 열어준 새 세상
퇴직을 앞두고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기억의 끝에서 떠오른 건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 동네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던 꼬마 시절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저놈 참 재밌다’ 하며 시키면 거리낌 없이 노래하고 춤췄죠. 그때가 정말 행복했어요.” 이 회상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었다. ‘나를 다시 찾는 과정’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공부에 치여 예술과 멀어졌지만,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며 다시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졸업 후 그는 대기업 홍보부서에 입사해 35년 동안 공연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그땐 기자들과 술 마시고 밥 먹는 게 일상이었죠. 공연이나 문화생활은 생각조차 못했어요.”
그의 삶을 바꾼 건 퇴직 직후 우연히 본 뮤지컬 ‘영웅’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다룬 공연이었는데, 배우의 절규를 듣는 순간 온몸이 전율했어요. ‘이게 진짜 나를 움직이는 힘이구나’라는 걸 느꼈죠.” 그날 이후 그는 공연장을 삶의 일부로 삼았다. 발레, 오페라, 국악, 연극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공연 관람만으로도 일주일 일정이 꽉 찬다.
그의 무대는 서울을 넘어 전국으로 확장됐다. “강원 대관령 음악제, 통영 음악제, 영동 국악페스티벌 등 지방 공연도 직접 찾아가요. 공연도 보고, 여행도 하고, 지역문화를 함께 느끼는 게 제겐 ‘종합예술’이에요.”
그는 특히 대극장보다 소극장을 더 사랑한다. “대학로엔 100석 미만 소극장이 100곳 넘어요. 의자도 불편하고 공간도 협소하지만, 배우의 숨결과 땀, 손 떨림까지 느껴지죠. 그 밀도감이 최고예요.” 그는 관객이 아닌 ‘무대의 동반자’로서 배우의 연기를 함께 느낀다. “연기자의 손짓 하나에도 제 심장이 반응해요. ‘내가 저 배우라면 어떻게 연기했을까’ 상상하면서 몰입하죠.”
◆100만 블로거가 된 ‘공연 애호가’
“제가 이렇게 건강하고 행복해 보이는 이유요? 공연장에 가는 그 길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에요.” 그는 자전거를 타고 공연장으로 향한다. “한강 자전거길이 너무 좋아요. 건강도 챙기고, 바람을 맞으며 달리다 보면 공연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마음이 상쾌해져요. 요즘은 청계천 자전거도로가 대학로와 연결돼 있어서 종로를 지나 공연장까지 쭉 갈 수 있죠.”
그에게 공연은 단순한 문화생활이 아니다. “사람의 몸에도 배터리가 있잖아요. 운동과 식사는 육체의 충전이라면, 공연은 정신의 충전이에요. 무대에서 배우들이 쏟아내는 에너지가 제 안의 불을 다시 켜줍니다.”
이씨는 퇴직 후 공연 전문 블로그 ‘매일 공연 보는 남자’를 운영하고 있다. 누적 조회수는 125만회를 넘겼다. 이씨의 블로그에는 공연 후기뿐 아니라 공연 추천, 예매 방법, 할인 정보 등 실질적인 가이드가 담겨 있다. 특히 “공연장은 문턱이 높다”며 공연을 처음 접하는 50~60대를 위해 친절한 안내자가 되고자 한다.
그는 “공연 전후로 사진 찍기, 뒷풀이 등 작은 즐거움까지 포함한 ‘공연 문화 전체’를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또 “공연은 배부른 사람의 사치가 아니라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정신의 양식”이라고 강조했다. 이씨는 “공연을 자주 즐기다 보면 인생의 에너지가 달라질 것”이라며 “무료로도 즐길 수 있는 공연이 많은 만큼, 더 많은 이들이 무대를 통해 행복을 찾길 바란다”고 전했다.
◆“공연의 감동, 강의로 전하고파”
그는 공연을 통해 얻은 감동을 나누기 위해 강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공연의 행복을 그냥 블로그에만 남길 수는 없더라고요. 직접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어요.” 9월 초 그는 고려대학교 ‘명강사 최고위 과정’에 입학했다. “2주 전부터 명강사 과정을 듣고 있어요. 강의 자격증은 민간 자격이지만, 자격보다 중요한 건 메시지죠. 공연이 어떻게 제 인생을 바꿨는지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그의 목표는 퇴직 후 방황하는 50~60대에게 ‘공연을 통한 인생 재발견’을 강의하는 것이다. “퇴직 후 ‘이제 뭘 해야 하나’ 고민하는 분들에게 공연을 통해 행복 전도사가 되고 싶어요. 연극이든 발레이든, 무대는 사람을 다시 살아 있게 만듭니다.” 그는 서울시 ‘50플러스센터’에 직접 강의 프로그램을 제안할 계획이다.
“‘공연을 통한 행복한 인생 찾기’ 같은 프로그램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거꾸로 제안하려고 해요. 블로그도 운영하고, 책도 쓰고 있으니까요. 제 강의가 누군가의 길잡이가 되면 그게 제 보람이에요.”
이씨는 내년 출간을 목표로 퇴직 후의 변화를 담은 책을 집필 중이다. “퇴직 후 내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리고 연극이 제게 어떤 힘을 줬는지를 나누고 싶어요. 제목 후보는 ‘나는 왜 대학로로 가는가’ 혹은 ‘60세에 퇴직하고 대학로로 간 이유’예요. 제 이야기이자 우리 세대의 이야기죠”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책에는 중장년층이 문화예술을 통해 새로운 삶을 찾는 과정, 공연을 즐기는 법, 그리고 무대라는 공간이 주는 설렘이 담길 예정이다.
이씨는 현재 지역 평생학습관에서 연극 강좌를 수강하며, 함께 공부하는 시니어들과 시나리오를 연습하고 있다. 그는 “다들 저처럼 퇴직 후 새로운 삶을 찾는 분들이에요. 매주 만나 대본을 읽고 연기 연습을 하죠”라며 웃었다. 이씨의 목표는 공연의 감동을 전하는 명강사가 되는 것이다. 아직은 미흡하지만, 꾸준히 시나리오를 연습하며 언젠가 직접 무대에 서서 관객과 감동을 나누는 것도 그의 또 하나의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