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 추석, 체온을 함께 나눌 때입니다

2025-10-02     천지일보

이문성 전 명지전문대 겸임교수/법학박사

올해도 어김없이 추석이 돌아왔다. 하지만 달빛이 아무리 밝고 둥글어도, 그걸 함께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은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인다. 예전처럼 대가족이 북적이는 한가위는 이미 옛말이다. 1인·2인 가구가 보편화된 시대, 명절은 ‘모임’보다 ‘거리’를 의식하게 만드는 시간이 돼가고 있다. 

몇 시간만 얼굴을 마주해도 불편한 질문과 어색한 침묵이 반복되니, 오히려 추석이 부담스럽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추석 연휴가 지나면 연말 시즌이 된다. 학교 진학과 졸업, 취업이 연이어지는 순간들이 다가온다. 물론 취업 적령기, 결혼 적령기의 세대는 한 살 더 먹을 날이 바로 코 앞이다,

 그 덕에 추석날에 대입, 고입, 취업을 앞둔 청년들은 명절마다 반복되는 덕담 아닌 덕담에 지치고 상처 입으며, 결혼을 고민하는 세대는 “이제 나이도 있는데”라는 말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부모 세대는 부모 세대대로, 자녀와의 대화가 서로를 소외시키지 않기를 조심스럽게 바라보게 되나 정치 이야기라도 시작되면, 그날은 끝이다.

실패한 계엄령 기도 이후 내란 혐의로 수감된 윤석열 전 대통령의 초췌한 모습은 국민에게 충격을 줬고, 일부 종교 지도자의 연이은 구속과 같은 사건은 윤리적 권위의 붕괴를 체감하게 한다.

대법원장을 향한 날카로운 공격은 삼권분립의 원칙을 흔드는 모습으로 비춰지고, 급기야 야당 해산론까지 언급되며 정치 갈등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재명 대통령이 추석 연휴 직전에 꺼낸 전시작전권 환수 발언은 안보 불안감을 다시 자극했고, 정부조직법 개정에 따라 검찰청 폐지를 둘러싼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일부 특검 검사들은 원대 복귀의 뜻을 밝히고 있으며, 여권은 기대에 한 치도 어긋남 없이 ‘항명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거친 목소리로 화답을 하고 있다.

국정 운영을 둘러싼 신뢰는 위태로운 모래 위에 세워진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이 무척이나 불편하게 느껴짐은 어느 진영에 속해 있든 공통된 심정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추석에 만나야 한다. 불편해도, 어색해도, 싸움이 날 것 같아도. 왜냐하면 인간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관계와 연결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해리 할로우(Harry Harlow)가 1957년 진행한 이른바 ‘헝겊 원숭이 실험’은 이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할로우는 어미가 없는 새끼 원숭이들에게 두 종류의 인형을 제공했다. 

하나는 철사로 만든 인형에 젖병이 달려 있는 형태였고,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진 인형이었지만 먹이를 줄 수 있는 장치가 매달려 있지 않았다.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젖병으로 따뜻하고 영양가 많은 음식을 제공하고 있는 철사 인형에 다가가리라 생각했으리라. 경제력으로 세계 10위권의 강국을 일궜지만, 아직도 ‘먹사니즘’이라는 원초적 수준의 말이 통용되는 한국 사회를 비추해 보면 너무도 당연한 예측이라 하겠다.

그러나 대부분의 새끼 원숭이는 배가 고플 때만 철사 어미에게 다가가 젖을 먹고,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헝겊 어미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놀랄 때, 무서울 때, 외로울 때, 새끼 원숭이들은 먹이를 주지 않는 헝겊 인형을 찾아 안겼다. 어떤 개체는 헝겊 어미를 붙잡은 채로 몸만 돌려 철사 어미에게 다가가 젖을 먹기도 했다. 

할로우는 이 실험을 통해 “애착의 핵심은 먹이가 아니라, 접촉과 정서적 안정”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영장류는 먹는 것 이상으로, 안길 곳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후속 실험에서 사회적으로 고립된 원숭이들은 또래와 어울리는 데 실패하고, 부모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며, 극단적인 공격성과 무기력함을 보였다고 한다. 인간 역시 정서적 교류가 없는 상태에서는 온전히 성장할 수 없으며, 관계없이는 고립되고 병들 수밖에 없다.

정치는 중요하다. 그러나 정치에는 색깔이 있고, 수준의 높낮이가 있으며, 다양한 형태로 포장돼 있다. 그리고 수요자에 의해 소비되기 마련이다. 각자의 특수성과 개별성에 따라 정치는 선택되고 소모된다는 말이다.

누군가의 취미와 취향을 다른 자에게 강요한다는 것은 폭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화두로 인해 가족 간의 대화를 회피하거나, 소중한 순간을 망친다면 그보다 큰 손실은 없다고 하겠다.

2025년 대한민국의 추석은 차갑다. 정치의 온도는 극단으로 치닫고, 사회경제적 격차와 대립 양상은 식탁의 이야기까지 갈라놓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함께 할 수 있는 순간마저도 포기한다면, 우리는 더 깊은 외로움과 단절 속에 갇히게 된다. 체온이란, 말없이도 건넬 수 있는 위안이다. 

이해하지 못해도, 동의하지 않아도 괜찮다. 단지 그 자리에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정치를 잊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한 상 가득한 음식 앞에서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시간만큼은, 입법 권력의 무도함과 사회적 격차, 논쟁적 정치 담론이 침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오랜 시간 저질스런 권력자들의 통치 아래서 견뎌왔다. 때로는 침묵이 가장 강한 저항이 될 수 있다. 적대적 화두와 악마적 프레임은 저질스런 권력자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하다. 

말없이 안아주고, 조용히 들어주고, 다투지 않고 마주 앉는 시간은 어느 정치보다 깊은 유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 추석, 우리는 만나야 한다. 어색해도 좋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말없이 따뜻한 체온 하나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우리가 이 시기를 견뎌내는 힘이 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