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여름비 이야기’
기시 유스케, 다시 한 번 장맛비 같은 공포로 귀환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현대 호러·서스펜스의 일인자 기시 유스케가 ‘비’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여름비 이야기’로 2년 만에 독자를 찾았다.
장마철의 눅진한 공기처럼 끈적한 공포를 세 편의 중편으로 엮어 인간이 품은 악의가 어떻게 일상과 정신을 갉아먹는지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번 신간에는 ‘5월의 어둠’ ‘보쿠토 기담’ ‘버섯’이 수록됐다. 하이쿠, 곤충, 버섯이라는 신선한 소재를 축으로 삼아 논리적 미스터리와 심리 스릴러의 긴장을 교차시키며, 예측불가한 전개로 독자를 압박한다.
‘5월의 어둠’은 치매로 기억이 흐려지는 은퇴 교사가 제자의 부탁으로 자살한 오빠의 하이쿠를 해독하며 마지막 심경의 실체에 다가가는 이야기다. 단어 하나, 행 하나가 뜻하는 함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은폐된 진실이 물기 어린 어둠처럼 스며 오른다.
‘보쿠토 기담’은 193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향락에 빠진 청년의 꿈에 나타난 ‘검은 나비’가 지옥으로 이끄는 유혹임을 알게 되는 서사다. 설화적 모티프 위에 불길한 상징을 입혀 현실과 몽상의 경계를 서늘하게 흔든다.
‘버섯’은 별장지의 한 남자가 정원과 집안을 급속히 점령하는 버섯의 창궐을 목격하며 보이지 않는 악의의 주인을 의심하게 되는 이야기다. 일상을 잠식하는 낯선 생명체의 침투를 통해 관계의 파열과 고립의 공포를 가시화한다.
기시 유스케는 ‘검은 집’ ‘악의 교전’으로 인간의 악의와 사회 구조의 균열을 가장 현실적인 공포로 제시해온 작가다. 미스터리 ‘유리망치’, SF ‘신세계에서’ 등 장르를 넘나든 성취에 이어 이번에도 소재 조사와 구조 설계의 정밀함으로 독서의 지적 쾌감까지 끌어올린다.
‘비’ 시리즈는 일본 고전 설화집 ‘우게쓰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10여년에 걸쳐 기획·완성됐다. 전작 ‘가을비 이야기’에 이은 이번 권은 ‘장맛비가 내리면 애써 외면한 것들이 되살아난다’는 주제를 변주하며, 비틀린 악의가 스멀스멀 현실로 스며드는 순간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이 작품은 ‘이 호러가 대단하다! 2024 베스트10’에 이름을 올렸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간이라는 명제를 다시 확인시키며, 책을 덮고도 한동안 창밖 빗줄기를 의심하게 만드는 잔상과 전율을 남긴다.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