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 트럼프에게 조롱당한 그들의 정치

2025-08-28     천지일보

이문성 전 명지전문대 겸임교수/법학박사

새로운 협상 발표나 의례적 공동성명조차도 없는 한미 정상회담이었다. 지난 6월 출범한 이재명 정부가 기존의 반미·반일 프레임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을지 우려한 시각이 많았다는 점에서 조심스럽게 지켜본 정상회담이었다. 

더불어민주당과 일부 진보 언론들이 윤석열 전 정부의 외교적 성과와 무관하게 집요하게 괴롭힌 것처럼 필자는 악의적 시선으로 대통령의 방미를 보고자 하지 않았다. 한국을 대표해 트럼프와 회담을 가져야 할 대통령의 어깨가 무거울 것이기에 지지를 보내고 행운을 빌 뿐이었다.

국제 외교무대에서 전통적 우방국들과의 관계 유지와 신뢰 확보를 얻기 위한 정부의 외교적 노력은 중요하게 평가받는다. 그런 점에서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정권의 안전과 유지 차원에서도 무난히 넘어야 할 시험대였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크게 두 가지가 눈에 띄었다. 우선은 회담 3시간을 앞두고 한국 정치 상황을 ‘숙청’ 단계라고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대목이다. 그에게 한국 정치 상황을 직언하거나 보고한 정보 계통이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트럼프 개인의 독특함으로 치부해 버리려는 일부 진보 언론의 안이한 해석이 있으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많은 시사점을 내포한 글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불법 비상계엄을 내란혐의로 수사하고 있는 단계에서 이미 내란죄로 확정한 것처럼 여당은 확신하며 야당인 국민의힘을 위헌 정당으로 못을 박아 해산시켜야 한다고 공언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을 파면한 헌법재판소에 제소돼 해산 결정을 받게 되면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 전원은 그 직을 박탈당하고 국회는 사실상 일당 체제가 된다. 

또한 특검은 전 정부 인사에 대한 광범위한 수사와 함께 체포·구속을 단행하며 그 과정에서 한국군 지휘 체계 확인을 위해 미군이 주둔한 오산 공군기지까지 압수수색하기도 했다. 6공화국 출범 이후에 이 정도로 전 정부에 대한 광범위한 수사와 야당에 대한 강력한 압력이 가해진 전례가 있었는지 찾기 힘들 지경이다. 

이러한 상황을 ‘숙청’ 또는 ‘혁명’ 수준이라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언한 담당자와 그 세력이 있으며, 이들은 이 대통령이 귀국한 뒤에도 백악관과 그 주변에 남아 한국 정치 상황을 계속해 보고할 것이다. 

25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회담 내내 굳은 표정이었던 밴스 부통령까지 함께 파안대소하며 화기애애한 모습이 갑자기 연출됐다. 

문제는 왜 웃었느냐에 있다. 미군기지(오산공군기지)를 특검이 압수수색을 한 것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있자, 이 대통령이 해명하는 과정에서 트럼프가 이런 말을 했다. “그 특별검사 이름이 정신 나간 잭 스미스인가”라고 하면서 주변의 웃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이에 이 대통령도 함께 파안대소한 모습을 ‘화기애애한 장면’이라며 진보 언론이 깊이 다뤘다. 그러나 잭 스미스는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트럼프를 ‘대선 결과 불복’ 혐의 등으로 기소했던 전 연방 특별검사 이름이다. 즉 트럼프 자신을 형사 기소한 특별검사 이름을 거론하며 한국 정부의 조치를 에둘러 지적한 뼈 있는 발언이었다.

국회의 다수당이 주도하고 이 대통령이 승인한 특검을 가리켜 ‘잭 스미스’가 아니냐고 지칭한 트럼프의 발언을 통해 한국의 집권 세력에 대한 그의 인식이 분명히 드러났다는 점에서 앞으로 외교 향방을 가늠할 수 있겠다.

트럼프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한국 집권 세력이 자신에게 보내는 우호적 제스쳐가 아니다. 한국 경제력이 가진 투자 여력과 높은 생산성을 가진 노동력, 세계에 입증된 기술력이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 동맹관계에서 묻어난 상호신뢰와 존중을 찾기 어려운 정상회담이었다.

실리를 얻고자 하지만 한국 정치계를 신뢰하기 어려운 트럼프. 정권의 안전과 외교적 인정을 약속받고 싶어 한 이재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로 눈에 들어온 점은 한반도 남북관계의 주도권과 관련된 이 대통령 발언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을 ‘피스메이커’로 치켜세우고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달라고 요청하며 자신을 ‘페이스메이커’로서 자처했다. 

페이스메이커(pacemaker)는 사전적으로 마라톤과 같은 중거리 이상의 달리기 경주 등에서 선두권과 함께 달리며 일정한 페이스를 유지하도록 돕는 보조선수를 말한다. 다른 선두권 선수들의 기록 경신이나 유지를 위해 희생하는 일종의 ‘전략적 보조선수’라고 할 수 있다.

남북의 관계는 경색된 관계에 놓여 있다. 이는 2019년 2월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간 하노이 회담 실패에 기인한다. 당시 회담에 문재인 정부가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대(對)북한 관계가 아무리 위기 상황에 놓였더라도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우리 정부가 주도권을 스스로 포기한 적은 없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 앞에서 ‘보조선수’를 자처했다. 이 대통령은 전시작전권 환수 등 일련의 발언을 통해 대북 관계에 있어서 능동적 위치를 여러 차례 공언하지 않았는가. ‘페이스메이커’가 회담에서 무슨 뜻으로 쓰였는지 두고 봐야 할 일이다.

헌법상 ‘평화통일’을 국가적 책무로 채택했고 중앙부처로서 통일부까지 설치한 나라에서 한반도 남북관계의 주도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페이스메이커’의 의미는 두고두고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언급이었다고 보인다.

너무 긴장하며 정상회담을 지켜본 탓일까. ‘숙청과 혁명’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오래 남을 것 같다. 트럼프는 조롱 조로 ‘사업하기 어려울 정도’라며 신뢰하기 어려운 한국 정치의 상황을 거론했다. 

여의도에서 매일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사람이 아니다’라고 발언하며, 그 직을 박탈할 수 있는 정당 해산으로 협박하는 이 지경에 그 정도의 조롱은 그나마 다행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