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포커스] 시니어 모델 그룹 ‘써미트 포럼’의 도전… “멋짐에는 나이가 없다”
경험과 연륜으로 뭉친 모델들 “무대에 서는 순간 절반은 승리” 사람을 보여주는 도구 ‘패션’ “한계는 내가 정하고 깨는 것” “콤플렉스를 강점으로 바꿔야” 각자 신념으로 발걸음 내디뎌
[천지일보=원민음 기자] 서울역 한 카페, 훤칠한 키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이 눈길을 끌었다. 얼핏 보면 20대 신인 모델 같지만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를 들여다보면 놀랄 만큼 깊은 ‘연륜’이 묻어난다. 그럼에도 그들의 표정과 걸음에는 여전히 도전하는 사람 특유의 설렘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시니어 모델 그룹 ‘써미트 포럼(Summit Forum)’이다.
정초신 감독이 기획한 이 팀은 이름처럼 각자의 ‘정점(Summit)’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단순히 런웨이에서 옷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인생 경험과 개성을 패션에 담아 관객에게 전하는 무대를 지향한다. 현장에서 느낀 써미트 포럼의 매력은 단순 패션을 넘어 ‘사람’을 보여준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인생의 정점’을 향해 다시 한번 발걸음을 내디딘다. 이들의 첫인상은 ‘무대 위에 서는 것만으로 이미 절반은 승리’라는 강한 확신이었다.
정 감독은 “써미트 포럼은 세대를 뛰어넘어, 경력과 인생 이야기를 입고 걷는 무대”라며 “패션은 옷이 아니라 사람을 보여주는 도구”라고 강조했다. 그 말처럼 써미트 포럼의 멤버들은 각기 다른 삶의 경로를 거쳐 이곳에 모였고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진솔하고 강렬했다.
◆ “큰 키, 콤플렉스였지만… 이제는 나만의 달란트”
박혜연(48)씨를 처음 마주했을 때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의 긴 실루엣을 따라갔다. 퍼블리싱 업계에서 오래 일해온 그는 오랜 시간 무대와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았다.
그는 “어렸을 땐 큰 키가 오히려 부담이었다. 기성복이 맞지 않아 걸치고 가리기에 급급했다”며 회고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모델 활동을 하며 오히려 그 키가 개성이자 장점이라는 걸 깨달았다.
박혜연씨는 “첫인상은 3초 만에 결정된다. 패션은 나를 대신하는 거울”이라며 “나쁜 편견을 줄이고 호감을 줄 수 있는 도구”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하얀 도화지’라고 칭하며 “그릴 때마다 달라지는 모습이 제 장점”이라며 “나만의 루틴으로 인내하고 아끼며 세월을 우아하게 맞이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 “나이의 한계는 나 스스로 정하는 것”
이현직(56)씨는 등장부터 강렬했다. 큰 체격에 짧고 분명한 말투와 늘어뜨린 장발에 선글라스까지. 전기소방안전관리자라는 직업처럼 그의 태도는 묵직했다.
그는 “20년 동안 정장만 입고 살았어요. 그런데 시니어 모델을 하면서 옷이 사람을 이렇게 바꿀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시니어 모델의 첫 감정의 설렘이 묻어 있었다.
첫 무대를 회상하는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현직씨는 “2021년에 앙드레김 선생님의 의상을 입고 섰어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이현직씨가 계속 도전하며 사는 이유는 마음에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신념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념은 삶의 방향을 잃지 않게 해주는 나침반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때론 나를 흔드는 상황도 많지만 내 안에 단단히 자리 잡은 신념 덕분에 흔들리지 않고 제 길을 걸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저에게 신념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삶을 움직이게 하는 이유이자 태도”라며 “나이의 한계는 스스로 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정체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177㎝의 장신 모델 이시진(51)씨는 부드러운 미소와 단정한 목소리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하지만 ‘정체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표정은 놀랄 만큼 진지해졌다.
그는 “나는 지금도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한다”며 “변화에 열린 태도가 스스로를 계속 움직이게 한다”고 말했다. 또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자기 삶의 무대는 언제든 본인이 열 수 있다는 믿음”이라고 강조했다.
이시진씨는 “패션은 나를 더 나답게 표현할 수 있게 해준 도구”라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는 매개체”라고 말했다. 이어 “특히 지금은 패션을 통해 나를 더 나답게 매력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큰 메리트”라고 강조했다.
그는 모델 활동 외에도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다스린다. 무대의 화려함과 명상의 고요함, 극과 극을 오가는 삶이다.
◆ “절제미가 곧 나의 무기”
송경숙(62)씨는 인터뷰 시작부터 ‘절제미’를 강조했다. 그는 “과하지 않지만 눈에 띄는 멋이 저의 스타일”이라며 “모든 일에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최선을 다하다 보면 힘들지만 희망을 계속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단단한 자기 확신이 있었다. 스키와 오프로드 랠리를 즐겼던 그는 패션을 통해 자존감을 되찾았다. 송경숙씨는 “패션은 컴플렉스를 강점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며 “모델 동료들과 큰쇼를 함께 해내고 무사하게 끝남을 자축하며 서로에게 박수 쳐줄 때가 항상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 “안 되면 될 때까지”
신선영(58세)씨는 이력만 들어도 한 편의 다큐멘터리였다. 사무원, 배구강사, 밴드 키보드 연주자, 태권도 유단자까지.
그는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는 거죠. 음악도, 운동도, 모델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그가 ‘천사나 악마 캐릭터를 해보고 싶다’고 말하며 웃을 때 무대 위에서 그의 표정이 얼마나 다채로울지 상상하게 됐다. 그는 단순한 모델이 아니라, 경험을 무대로 풀어내는 ‘배우형 모델’이었다.
◆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걸어가는 것”
정태화(54)는 담백했다. 어린이 통학버스를 운전하다 모델이 된 그는 화려한 말 대신 조용히 속내를 풀었다.
그는 “다들 초반에 열심히 하다가 포기하는 일이 많다. 나의 목표는 끝까지 걷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짧았지만 그 짧은 문장 안에 무게가 있었다. 모델이 걷는 런웨이가 삶의 은유처럼 느껴졌다.
◆ “90세에도 무대에 서고 싶다”
김민경(51세)씨는 인터뷰 시작부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90세가 돼도 무대에 서겠습니다.”
레이싱모델 출신답게 그의 포즈와 눈빛에서 노련함이 묻어났다. 손끝과 시선, 몸을 돌리는 각도까지 모든 것이 계산돼 있었다. 인터뷰 내내 그가 무대 위에서 관객을 압도하는 장면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됐다.
그는 모델 일에서 중요한 점으로 ‘자아실현’을 꼽았다. 김민경씨는 “일을 하며 나를 찾아가는 모습이 너무 행복하다”며 “제가 가장 사랑하는 직업이자 모든 것이 바로 모델일”이라고 말했다.
◆ “도전하는 것이 언제나 정답”
윤희숙(65년생)씨는 176㎝의 큰 키를 지녔다. 보험설계사에서 배우·모델로 변신한 그는 말투까지 확신으로 가득했다.
“거울 앞에서 ‘오늘도 괜찮다’고 말해요. 그게 비결이죠.”
그는 “패션은 제 기분 조절 리모컨”이라며 “멋지게 입으면 기분도 올라간다. 나 자신을 응원하는 방법이기도 하다”고 미소를 지었다.
다만 신념을 말할 때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도전은 언제나 정답입니다. 나이는 전혀 상관없어요.”
그의 웃음 뒤에는 자신을 믿는 힘이 있었다. 그 웃음이 단순한 매너가 아니라, 매일 거울 앞에서 자신에게 건네는 확신의 표현임이 느껴졌다.
◆ “모델계의 유재석이 되고 싶어요”
이강식은 방송, MC, 쇼호스트, 광고모델을 넘나든다. 특히 중국에서 열린 ‘미스터 아시아 어워즈’ 본선 무대는 그에게 커다란 도전이었다.
그는 “춤도 노래도 못하는데, 중국어 나레이션에 드라마 형식으로 무대를 꾸몄다”고 회고하며 “그게 제 한계를 깼다”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강식씨는 “패션은 나의 다른 면을 발견하게 해준다”며 “MC와 방송, 모델 등 어디서든 맡는 역할이 빛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패션이 필요하다. 그 옷을 입었을 때 더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강식씨는 “겸손하면서도 상대방을 빛내는 모델, 모델계의 유재석이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써미트 포럼의 무대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화려한 옷과 조명만이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 무대 위에는 각자의 인생이 있었고, 발끝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런웨이를 타고 객석으로 전달됐다. 나이와 경력을 넘어,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증명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메시지는 한결같았다.
“멋짐에는 나이가 없습니다. 오늘이 바로 우리의 무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