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압박’ 美에 쌀·소고기 ‘레드라인’ 선언
연료용 옥수수 수입 카드 꺼내 ‘농·축산업계 반발’ 의식한 듯 日·英, 농산물 개방해 통상 성과 美, 한국에도 압박 수위 높일 듯
[천지일보=유영선 기자] 정부가 오는 25일 예정된 한미 통상협의에서 쌀과 소고기 같은 민감한 농산물은 협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대신 바이오에탄올 원료로 사용되는 연료용 옥수수 수입 확대를 협상 카드로 제시할 방침이다. 이는 식량안보와 국내 농업 보호를 우선시한 조치로, 농업계의 강한 반발을 고려한 결정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2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이 같은 방향이 최종 확정됐으며, 이는 농민 생계와 직결된 쌀, 광우병 우려가 존재하는 소고기의 특수성을 반영한 조치다.
한국은 미국, 중국, 호주 등 5개국에 쌀 저율관세할당물량(TRQ)을 적용하고 있으며, 이 중 미국 몫이 13만톤으로 전체의 약 32%에 이른다. 쌀 수입을 더 확대하려면 세계무역기구(WTO)의 동의와 국회 비준이라는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또한 30개월령 이상의 미국산 소고기는 가축전염병 예방법에 따라 수입이 금지돼 있다. 만약 이를 허용하면 EU 등 다른 국가와의 통상 형평성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대안으로 연료용 옥수수 같은 에너지 작물을 활용할 계획이다. 옥수수는 자급률이 0.7%에 불과하고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국내 생산자 반발이 적다. 지난해 수입된 옥수수는 총 1130만톤이며, 미국산 비중은 22% 수준이다.
다만 현재까지는 바이오에탄올 자체를 수입하는 구조여서 연료용 옥수수 수입은 실질적으로 많지 않다. 미국 측이 요구한 사과와 유전자변형생물체(LMO) 감자 수입은 이미 과학적 절차만 남은 상태다. 미국 사과는 30년 전부터 검역 협상이 진행 중이며 현재 8단계 중 2단계를 통과한 상태다. LMO 감자 역시 농촌진흥청이 ‘적합’ 판정을 내린 상태로 식약처의 안전성 평가만 남아 있다. 산업계 일부에서는 쌀과 소고기를 협상 대상에서 제외하면 미국과의 통상 협상에서 한국이 내세울 수 있는 카드가 약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미 미국과 새로운 무역 합의를 체결한 국가들, 예컨대 영국, 일본,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은 대부분 자국의 농산물 시장 개방을 주요 협상 카드로 활용했다. 인도네시아는 미국산 자동차, 농산물, 의약품에 대한 각종 규제를 완화하는 대신 미국이 부과한 관세율을 32%에서 19%로 낮추는 조건을 받아냈다.
일본도 미국과의 협상에서 상호관세율을 25%에서 15%로 낮추는 대가로, 쌀과 일부 농산물 시장을 추가 개방하기로 합의했다. 영국은 미국산 농축산물 수입 확대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자국산 철강·알루미늄·자동차에 대한 미국의 관세를 완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다른 국가들이 농산물 시장 개방을 통해 통상 성과를 얻은 만큼 미국이 한국에도 비슷한 수준의 양보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에 따라 국내 농축산업계는 한미 통상협의의 최종 결과가 나올 때까지 깊은 경계심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앞서 통상 당국이 미국과의 관세 협상 과정에서 농축산물 시장 추가 개방 가능성을 시사하자 관련 단체들은 강경 대응을 예고한 바 있다.
한국농축산연합회, 한국종합농업단체협의회, 축산관련단체협의회, 농민의길 등 주요 농업 단체들은 지난 18일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농민의 동의 없이 농축산물 관련 관세나 비관세 장벽이 철폐될 경우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며 “대한민국 농업의 지속가능성과 국민의 건강권 수호를 위해 전면적인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