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세이] 렛츠런파크 서울 말박물관 ‘말과 사람, 문화를 잇다’
서울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그 공기부터가 다르다. 회색빛 건물들 사이로 작게 꾸며진 공원이 있다지만, 드넓게 펼쳐진 풀밭과 수많은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봄날의 따스한 볕을 따라오기란 쉽지 않다.
서울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과천 경마공원으로만 나가도 숨이 탁 트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경마’라는 단어에 어딘가 모를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 초점을 ‘공원’에 맞춰본다면 가족 단위로 나들이하기에 이만큼 좋은 공간도 없다. 더욱이 경마공원 안에 위치한 ‘말박물관’까지 둘러보고 온다면 꽤 괜찮은 소풍이 될 테니 말이다.
경마공원 내 말박물관
서울 지하철 4호선 경마공원역 바로 앞에 위치한 경마공원. 그 안에 말박물관이 있다. 말박물관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사실 달리는 ‘말(馬)’을 떠올리기보다 음성 기호인 ‘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일상과 더 친근한 것이 후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햇살이 유난히도 좋은 4월의 한 날, 말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은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과 추석, 기타 임시휴관일을 제외한 화요일부터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운영된다. 지하철역에서 박물관까지 꽤 걷는 편이라 단체 관람객을 위한 셔틀도 운행 중이라고 하니 미리 확인하면 좀 더 수월하게 관람할 수 있다.
이날 관람은 말박물관 김정희 학예연구사의 안내로 보다 풍성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말박물관의 연혁은 물론 말과 사람이 함께해온 역사부터 경마의 시작과 경주마에 대한 설명까지 듣다 보니 꽤 흥미롭게 느껴졌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자료와 전시품, 동선 등이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둘러보기에 딱 알맞게 꾸며졌다는 생각이다.
박물관은 단체 견학을 위한 ‘박물관 전시설명’과 가족 단위 등의 소모임을 위한 ‘박물관 Talk’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박물관 전시설명은 전화 사전 예약으로 진행되며, 박물관 Talk는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2시~2시 30분에 진행된다. 이외에도 박물관 한쪽 전시공간에서는 말과 관련된 작품들을 전시하는 갤러리가 있어 신인작가 발굴 등에도 힘을 실어주고 있다.
말박물관은 1988년 경마 문화의 이해와 말(馬)과 관련된 인류 문화의 발전사를 알리기 위해 한국마사회가 설립했다. 특히 서울올림픽 개최에 맞춰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말 문화를 체계적으로 보존·전시하려는 취지가 강했다.
박물관은 설립 초기부터 국내외의 다양한 마문화 자료를 수집하고 교육적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운영됐다. 지난 2012년에는 전시 공간을 확장하고 어린이 체험 프로그램을 추가해 관람객의 접근성을 높였으며, 현재까지도 특별전과 학술 세미나를 꾸준히 개최하고 있다.
‘말과 인간의 공존’을 테마로 한 전시구성은 시대별 말 관련 유물뿐 아니라 한국경마의 발전사, 말 사육 문화의 변천사를 아우르고 있다.
먼저 말박물관에 들어서면 입구에 대형으로 제작된 말의 생물학적 진화과정과 마문화 연표가 있어 한눈에 살펴보기에 편하다.
전시 공간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한쪽은 재갈․안장․발걸이 등을 한 말갖춤이 시대별로 전시돼 있고, 실제 크기의 말 모형에 고분에서 출토된 각종 마구를 복원 장착해 놓은 것도 볼 수 있다.
다른 한쪽은 신앙의 대상에서부터 민속의 상징과 예술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등장한 마문화 관련 유물이 전시돼 있다.
특히 백제의 당초무늬 발걸이와 통일신라시대 순은으로 제작된 대형 말방울은 예술적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며, 고종황제의 아들 영친왕이 사용하던 안장과 발걸이 또한 대표적인 소장품이다. 편자와 말꼬리, 말이 먹는 사료를 만져볼 수 있는 체험 코너도 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말 문화
한국에서 말은 단순한 교통수단을 넘어 국방, 농업, 정치, 사회 전반에 깊숙이 관여해 왔다.
삼국시대부터 기록된 말의 사용은 특히 고구려 벽화 고분(무용총 수렵도)에서도 볼 수 있다.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기병’이 국가 전력의 핵심이었고, 조선시대에도 마장(馬場)이 전국에 설치돼 말을 조직적으로 사육·관리했다.
<조선왕조실록>의 “마장을 흥인문(興仁門) 밖에 수축하였다. 마장리의 권농(勸農) 장수(張守)가 의창(義倉)의 조세를 독촉하여 바치니”라는 내용에서 마장의 처음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말은 또한 왕권의 상징이자 통신(파발제)과 교역(실크로드 연결)의 주요 수단이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는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여러 역사서에 자세히 기록돼 있으며, 말과 관련된 다양한 전설과 민간 설화 역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신화와 민담 속 말(馬)
한국 전통 설화와 신화에서도 말은 신비롭고 중요한 존재로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신라의 건국 신화인 박혁거세 설화에서 흰 말이 알을 품는 장면이다.
또한 <삼국유사>에 기록된 주몽 신화에서도 주몽을 돕는 신마(神馬)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이는 하늘과 인간을 잇는 존재로서의 말의 위상을 보여준다.
민간 신앙에서는 말이 액운을 쫓고 복을 부른다고 여겨져 말 그림(馬圖)을 집에 걸어두는 풍습이 유행하기도 했다. 오늘날까지도 농촌에서는 ‘말발굽’ 모양을 행운의 상징으로 여기는 문화가 남아있다.
과거를 달려 미래로
말박물관은 전통 보존을 넘어 현대 사회에서 말 문화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하는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현재 박물관은 어린이 대상의 승마 체험과 VR 경마 체험 그리고 ‘힐링 승마’ 프로그램을 통해 현대적 감각을 접목한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승마 치료’는 신체적·정신적 재활 프로그램으로 관심을 끌고 있으며, 말이라는 존재가 단순한 전시 대상이 아닌 치유의 매개체로도 활용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또한 말박물관은 마구, 미술품, 민속품 등 각종 마문화 관련 자료의 수집․전시와 학술 연구의 지원, 서적 간행, 전통 마상무예 사연 행사 등의 활동을 통해 사라져가는 마문화를 복원하고 보급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말박물관은 앞으로도 말과 인간, 문화의 깊은 관계를 알리고, 한국 말 문화의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는 장으로 거듭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이어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