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탐방] 공생의 삶터 ‘어반 정글’

2025-03-16     천지일보

박희제 언론인

올겨울의 추위는 유난히 길다. 요사이 일교차가 너무 큰 탓인지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고사성어가 떠오른다. 얼마 전 몇몇 지인들과 도심 포구 횟집에 모여 요즘 날씨와 같은 ‘차가운’ 세태를 얘기했다.

지난해 12월 3일 느닷없는 비상계엄령 선포 이후 석 달 넘게 이어지는 탄핵 정국으로 모두의 마음이 무거운 듯싶다.

계엄령 선포 직후 국회 해제 의결, 대통령 탄핵소추, 헌법재판소의 심판 개시, 현직 대통령 체포와 구속, 서부지방법원 폭력 난동, 그리고 법원의 구속 취소 판결에 따른 대통령 석방 등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격류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다. ‘광장 정치’가 판을 치니 정국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횟집에서 이런저런 푸념을 하는 동안 창밖의 갈매기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바닷가에서 날아온 새가 우리와 시선이 마주치자 강렬한 눈빛을 발사했다. 먹던 회를 던져줘야 할지 고민하게 했다.

닫힌 창문 위엔 ‘새들에게 먹이 주지 마세요’라는 손글씨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음식물 던져주길 기다리듯 갈매기는 창밖 테라스를 계속 맴돌며 서성거렸다.

도심 주변에 사는 새들은 인간 음식에 익숙해졌다. 새우깡은 갈매기의 ‘최애’ 간식이기에 떼를 지어 여객선을 따라온다. 승객 손가락에 새우깡을 쥐고 있으면 순식간에 낚아채는 곡예를 부린다. 거리에 떨어진 음식을 먹는 까마귀, 비둘기들은 너무 흔해졌다.

영국 BBC 방송의 동물 다큐멘터리를 통해 보니 미국 뉴욕 거리를 활보하는 ‘도로 개미’도 도시의 새들처럼 ‘인간 식단’에 잘 적응했다. 그들은 이제 거리 쓰레기를 처리하는 일등공신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다.

개미보다 4천만 배 무거운 사람 발길에 짓밟혀 죽을 수 있는데도 거리에 떨어진 햄버거, 핫도그를 찾아 헤맨다. 먹이를 발견한 개미가 다른 동료들에게 페로몬을 발사해 먹이 위치를 알려주니 떼로 몰려간다.

‘서학 개미’ ‘동학 개미’ 같은 개인투자자들이 반도체와 가상화폐 같은 주식 투자에 열을 올리는 사이 진짜 개미들은 인간의 창조물을 빠르게 집어삼키고 있다.

인도네시아 발리섬의 긴꼬리원숭이는 ‘거래의 기술’에 능한 달인(영장류)이다. 발리 우붓 원숭이사원 내 ‘어반 정글’에 방목된 원숭이들은 모자, 선글라스, 지갑, 휴대폰 등 관광객 소지품을 순식간에 소매치기한다.

강탈한 물품을 들고 달아나다 멈춰서 주인이 음식물을 갖고 올 때까지 기다린다. 흔한 바나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초코바, 감자칩 등 마음에 드는 간식거리를 들고 와야 강탈한 물품과 맞교환한다.

울창한 열대우림의 고대사원을 느긋하게 거닐다 이런 봉변을 당하는 일이 흔하니 SNS 우붓사원 방문기에 “원숭이와 눈을 마주치지 말고, 휴대품 조심하세요”라는 글이 올라온다.

비상계엄령으로 촉발된 탄핵정국이 자칫 내전 상황으로 치달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하는 시기에 갈매기 한 마리가 엉뚱한 상념에 젖게 했다. 사람끼리 갈등하며 새로운 차원의 정치적 위험을 싹트게 하는 현실이 암담하지만, 그보다 기후위기로 인류세가 종말론적 상황으로 치닫고 사실이 더 위험하다는 걸 환기해 줬다.

“배설 시간은 짧아야 한다”고 일갈한 함석헌 선생의 말씀처럼 우리 사회를 정화하는 시간을 빨리 마쳐야 한다. 얼마 안 남은 헌법재판소 탄핵 결정을 계기로 한국 헌정 향방이 생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착한’ 도시 개발과 ‘따뜻한’ 공동체로 향하는 길로 들어섰으면 좋겠다.

얼마 전 서울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현대미술 소장품전에서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품을 감상했다. 이우환 김종영 등 한국 작가를 포함해 알베르토 자코메티, 리처드 디콘, 솔 르윗 등 현대미술의 거장 작품을 대거 감상할 수 있는 기획전이었는데, 그중 로댕의 ‘칼레의 시민’이 가장 인상 깊었다.

14세기 백년전쟁 때 프랑스 북부도시 칼레(Calais)에서 다른 시민들의 학살을 막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시민 대표 6명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로댕이 조각한 작품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표상인지라 1895년 칼레 시청 광장에 설치했다고 한다. 공동체를 살리려는 ‘칼레 시민’이 국내에서도 절실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