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신화 여행(한국편)] 염라대왕을 잡아 오너라!(후편)
글 신현배
강림 도령은 저승길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발길 닿는 대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얼마쯤 그렇게 갔을까. 강림 도령은 앞서 걸어가는 꼬부랑 할머니를 보았다. 물 묻은 행주치마를 입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할머니는 걸음이 무척 빨랐다. 아무리 쫓아가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강림 도령은 기운이 없어지고 맥이 풀려 떡이나 먹으면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그래서 나무 그늘에 털썩 주저앉았더니, 할머니도 길가에 주저앉아 보따리를 풀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시루떡이 들어 있었다. 강림 도령은 신기하다는 듯 할머니에게 말했다.
“아니, 어째서 할머니도 저와 똑같은 시루떡을 갖고 있죠?”
그제야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이놈아, 내가 누군지 모르겠니? 너희 집 부엌에 사는 조왕 할머니다. 네 어머니가 하도 나를 극진히 섬겨 네게 저승 가는 길을 알려 주려고 왔단다.”
할머니는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가리켰다.
“저 길을 쭉 걸어가면 일흔여덟 갈림길이 나올 거야. 그 가운데 저승 가는 길이 있는데, 잠시 앉아 기다리면 노인 한 분이 와서 그 길을 알려 줄 거다.”
강림 도령은 할머니가 고마웠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큰절을 올렸는데,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조왕신이 알려준 대로 고갯길을 가니 과연 일흔여덟 갈림길이 나왔다. 강림 도령은 길가에 앉아 기다렸는데, 잠시 뒤 할아버지 한 사람이 정말로 나타났다.
강림 도령은 할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렸다.
할아버지는 보따리를 풀면서 말했다.
“배가 고픈데 점심이나 먹고 갈까? 너는 내가 누군지 모르지?”
강림 도령은 할아버지가 풀어놓은 보따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이 갖고 있는 떡과 똑같은 떡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너희 집 대문을 지키는 문신이다. 네 어머니의 정성이 지극해 네게 저승길을 알려 주려고 왔지.”
할아버지는 일흔여덟 갈림길을 하나하나 설명하고는 마지막 남은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이 길로 가야 한다. 가시덩굴로 덮여 있는 좁고 험한 길이지. 한참 가다 보면 길을 닦다가 앉아 졸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될 거야. 그 사람에게 네가 가진 떡을 주면 저승 가는 길을 일러 줄 것이다.”
“문신 할아버지,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강림 도령은 벌떡 일어나 문신에게 또 큰절을 올렸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 보니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강림 도령은 좁고 험한 길을 걸어갔다.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마냥 걸어가자, 길을 닦다가 앉아서 졸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강림 도령은 그 앞에 시루떡을 조금 떼어 내놓았다. 그러자 그 사람은 눈을 번쩍 뜨더니 허겁지겁 떡을 먹었다. 무척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그는 배를 채우고는 강림 도령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디로 가는 길이오?”
강림 도령이 대답했다.
“저는 광양 고을 원님의 명으로 저승을 찾아갑니다. 염라대왕을 잡아 오라고 하셨거든요.”
길을 닦는 사람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저승에 가겠다고요? 어림없어요. 평생을 걸어도 저승에 도착하지 못해요.”
“그럼 어떻게 해야 저승에 갈 수 있죠? 제발 가르쳐 주세요.”
강림 도령은 길을 닦는 사람에게 끈질기게 매달렸다.
길을 닦는 사람은 떡을 얻어먹은 탓에 냉정하게 뿌리치지 못했다.
“할 수 없군요. 저승에 가는 방법을 알려 드리지요. 당신은 살아 있는 사람이니 몸 대신 혼으로 저승을 다녀와야 해요. 따라서 제가 저승 초군문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드리지요. 이 길을 쭉 가면 연못이 나오는데, 망설이지 말고 연못 속으로 뛰어들어요. 그러면 저승 초군문 앞에 와 있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강림 도령은 길을 닦는 사람에게 인사하고 그곳을 떠나려고 했다.
이때 길을 닦는 사람이 그를 불러 세웠다.
“염라대왕을 잡으러 저승에 간다고 하셨지요? 제가 한 가지 정보를 알려 드리지요. 모레 점심때쯤 염라대왕은 굿 잔치에 가려고 저승 초군문을 나설 겁니다. 그때 염라대왕은 다섯 번째 가마에 타고 있을 테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염라대왕을 붙잡도록 하세요.”
길을 닦는 사람은 강림 도령에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강림 도령은 길을 떠나 연못가에 이르렀다.
연못가에는 저승에 못 들어가는 굶주린 혼령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들은 강림 도령이 나타나자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젊은이, 나 좀 저승에 데려가 줘.”
“나도! 제발 부탁이야.”
혼령들은 강림 도령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그때 강림 도령은 시루떡을 꺼내 잘게 부수어 사방으로 뿌렸다. 그러자 혼령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떡을 주워 먹었다.
강림 도령은 이 틈을 타서 눈을 꼭 감고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저승 초군문 앞에 와 있었다.
강림 도령은 이곳에서 염라대왕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점심때가 되자 초군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더니 많은 신하를 거느린 염라대왕의 행차가 시작되었다.
염라대왕은 다섯 번째 가마에 타고 있었다. 강림 도령은 그 가마가 자기 앞으로 오자,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염라대왕에게 달려들었다.
“염라대왕아, 꼼짝 마라!”
강림 도령은 재빨리 밧줄을 꺼내 염라대왕을 꽁꽁 묶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강림 도령은 자기에게 덤벼드는 염라대왕의 열두 장사를 순식간에 때려눕혔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염라대왕의 신하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났다.
강림 도령이 말했다.
“나는 이승에서 온 강림 도령이오. 광양 고을 원님의 명으로 당신을 잡으러 왔소. 나와 함께 이승으로 갑시다.”
염라대왕이 말했다.
“나는 지금 굿 잔치에 가는 길이다. 거기에 들러서 함께 음식을 얻어먹고 이승으로 가자꾸나.”
“알겠어요.”
강림 도령은 염라대왕을 따라 굿하는 집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술을 실컷 얻어먹고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한참 자고 일어나니 염라대왕이 보이지 않았다. 강림 도령이 자는 틈을 타서 모습을 감춘 것이다.
강림 도령은 염라대왕을 찾으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때 조왕신이 나타나서 말했다.
“강림아, 장대 위를 보아라. 새 한 마리가 있지? 염라대왕이 새로 변해 앉아 있으니, 큰 톱으로 장대를 잘라라.”
강림 도령은 조왕신이 시키는 대로 큰 톱을 가져와 장대를 자르려고 했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강림 도령에게 말했다.
“너를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구나. 아직 굿이 끝나지 않았으니 네가 먼저 이승에 가 있어라. 그러면 이틀 뒤에 내가 광양 고을로 가마.”
염라대왕은 강림 도령에게 흰 강아지 한 마리와 떡을 주었다.
“이 강아지가 이승으로 가는 길을 아니 강아지 뒤를 따라가거라. 떡을 조금씩 떼어 먹여 달래면서 말이야.”
강림 도령은 강아지 뒤를 따라 이승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 보니 어느새 3년이 지나 있었다. 저승의 하루가 이승의 1년이기 때문이었다.
“강림아, 살아 돌아왔구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반겼다.
원님은 강림 도령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불러들였다.
“염라대왕을 잡아오라 했더니 어째 혼자 왔느냐?”
“염라대왕은 이틀 뒤에 오기로 했습니다.”
“뭐라고? 내가 그 거짓말을 믿을 것 같으냐?”
원님은 화를 벌컥 내며 강림 도령을 감옥에 가둬 버렸다.
그런데 이틀 뒤, 염라대왕은 약속대로 광양 고을에 나타났다. 그리하여 강림 도령은 감옥에서 풀려났고 염라대왕과 원님이 마주 앉게 되었다.
먼저 염라대왕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강림 도령에게 나를 잡아오라고 했느냐?”
원님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희 고을에 과양생이 부부가 사는데, 한날한시에 태어난 세 아들이 한 날 한 시에 죽었습니다. 이들이 갑자기 죽은 이유를 밝힐 방법이 없어 대왕님을 모셔 오게 한 겁니다.”
“으음, 그런 일이 있었구나. 과양생이 부부를 불러오너라.”
염라대왕은 과양생이 부부가 불려오자, 과양생이의 아내에게 물었다.
“너는 세 아들이 한 날 한 시에 한꺼번에 죽으니 마음이 어떻더냐?”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그럼 남의 집 세 아들을 죽였을 때 그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느냐?”
“예? 무슨 말씀인지….”
“시치미 떼지 마라. 네가 한 짓을 모를 줄 아느냐?”
염라대왕은 사령들을 불러 과양생이 부부의 아들들이 묻힌 곳을 파보게 했다. 그랬더니 그곳에는 시신은 없고 칠성판(관 속 시체 밑에 까는 널빤지)만 있었다.
염라대왕은 연화못으로 가서 금부채로 연못물을 세 번 쳤다. 그러자 연못물이 금세 말라붙더니 뼈가 드러났다. 동경국 버물왕의 세 아들 것이었다.
염라대왕은 뼈들을 모아 놓고 금부채로 세 번 쳤다. 순간, 뼈에 살이 붙고 피가 돌아 삼형제가 벌떡 일어났다.
염라대왕은 삼형제를 과양생이 부부에게 데려갔다. 그러고는 과양생이 부부에게 물었다.
“잘 보아라. 너희 부부의 아들들이냐?”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이죠?”
염라대왕은 그들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이번에는 삼형제에게 물었다.
“자세히 보아라, 저 여자가 누구냐?”
“저희들의 원수입니다. 비단을 가로채려고 저희들을 죽였습니다.”
염라대왕은 과양생이의 아내를 쳐다보았다.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지? 네가 죽인 삼형제가 네 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너를 깨우쳐 주려고….”
그제야 과양생이의 아내는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염라대왕은 그를 지옥으로 보내 죗값을 치르게 했다. 그리고 삼형제는 동경국으로 보냈다.
염라대왕은 강림 도령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강림 도령을 저승으로 데려가 차사로 일하게 했다. 저승 차사는 염라대왕의 심부름꾼으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수명이 다 된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오는 일을 맡아 한다.
그 뒤 강림 도령은 삼천년 동안 도망 다니던 동방삭을 붙잡는 등 저승 차사로서 큰 활약을 했다.
<신화 이야기 해설>
‘염라대왕을 잡아 오너라!’는 제주도의 무속 신화인 <차사본풀이>다. 이 신화는 제주도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강림 도령이 저승 차사가 된 사연을 풀이한 것이다.
강림 도령은 고을 워님 밑에서 일하는 아전이다. 어느 날 그는 똑똑하고 힘이 세며 배포도 두둑하다고 하여, 광양 고을 원님인 김치원으로부터 저승에 가서 이레 안에 염라대왕을 잡아오라는 분부를 받는다. 이에 강림 도령은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을 데려오는데, 염라대왕은 그가 마음에 들어 저승 차사로 일하게 한다. 저승 차사는 염라대왕의 심부름꾼으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수명이 다 된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오는 일을 한다.
이 신화의 주인공은 분명 강림 도령이다. 하지만 이 신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제 주인공은 강림 도령이 아니라 여성들임을 알 수 있다. 즉 김치원의 부인, 강림 도령의 어머니, 그리고 과양생이의 아내다.
김치원의 부인은 자기네 세 아들이 갑자기 죽은 이유를 밝혀 달라고 청하는 과양생이 부부 때문에 남편이 골머리를 앓자, 문제 해결의 방법을 찾아준다. 아랫사람인 강림 도령이 배포와 능력이 있으니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을 잡아오라고 해 염라대왕에게 물어보라는 것이다.
강림 도령의 어머니는 고을 원님에게 염라대왕을 잡아오라는 분부를 받고 고민하는 아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 떡을 만들어 조왕신과 문신에게 주어 강림도령이 그들의 도움을 받아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을 데려오게 한다.
과양생이의 아내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 동경국 버물왕의 세 아들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여인이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니, 흉악범인 사이코패스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이 신화는 과양생이의 아내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한 버물왕의 세 아들이 원수의 자식으로 다시 태어났다가 죽는 이야기를 통하여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인간에게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강림 도령의 여정을 통하여 저승 세계를 구체적으로 밝혀 놓음으로써 죽음 너머에 새로운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염라대왕, 강림 도령 등 죽음을 주재하는 신들이 무섭고 엄한 모습이 아니라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어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
조왕신이나 문신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강림 도령의 어머니가 시루떡을 만들어 바치고 아들에게 저승 가는 길을 잘 인도해 달라고 7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빌자 기꺼이 도와주러 나선다. 길 떠난 강림 도령에게 나타나 저승 가는 길을 친절하게 알려 준다.
조왕신이나 문신은 우리 조상들이 가까이 섬기던 가신(家神)이다. 이 신화에서 강림 도령의 어머니가 이들을 정성을 다해 섬기고 이들과 교류하는 모습을 보면, 이들 신이 우리 조상들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인지 알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