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사진으로 보는 역사] 관동대지진 대학살 101주기, 사진으로 드러나는 日의 ‘제노사이드’ 만행

2024-09-03     김현진 기자
관동대지진 대학살 현장(1923년). ​​​​​이렇게 많은 시신들이 어떻게 한자리에 모였는지 이러한 의혹부터 규명돼야 할 것이다. 일본 자경단에 의해 살해돼 넓은 공터로 이송돼 온 것이다. 이같이 집단으로 죽을 수 있는 것은 집중 학살 아니고선 법의학적으로도 의혹을 풀 수 없는 장면이다. 또한 장례문화가 발달한 일본은 자국민이라면 이같이 시신을 방치해두지 않는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4.09.03.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일본의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사건이 올해로 101주기를 맞았다. 관동대지진 대학살 사건은 다음과 같다. 1923년 9월 1일 일본 수도 도쿄를 포함한 관동지역은 규모 7.9의 대지진으로 인해 건물이 무너지고 화재가 발생하는 등 대부분 폐허가 될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다. 당시 이 지진은 일본의 경제가 좋지 않은 공황상태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민심의 추락은 상당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곧바로 계엄사령부를 설치하고 지진으로 인한 경제파탄으로 울분이 터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희생양을 조선인으로 돌렸다.

일본 계엄사령부는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조선인이 방화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등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계엄사령부는 언론에 거짓으로 흘려 일본 민심을 자극하게 했고, 무전과 전단, 포스터 등을 이용해 유언비어를 유포시킴으로써 관동지역 일대에 조선인들이 숨을 곳이 없도록 했다. 심지어 형무소에 수감 중인 죄수들까지도 다 내보내 자경단을 구성하도록 해 대학살을 자행하게끔 부추겼다. 마구잡이 조선인 사냥에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일부 죽기도 했으나 우리 선조들의 피해는 엄청났다. 이들에 의해 학살된 조선인은 독립신문에서는 6천여명으로 발표됐으나 독일 문헌에서는 2만 3000명 이상으로 기록됐다. 곧 일본의 자작극으로 인해 우리 선조들이 무참히 학살된 사건이다.

당시 일부 의식 있는 일본 언론들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잘못된 유언비어에 의해 많은 조선인이 무고하게 학살됐다고 기사와 사설 등으로 내보냈다. 이에 일본 교과서에도 명백히 일본인이 조선인을 학살했다는 내용을 기술해왔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일본은 학살이라는 표현을 ‘살해’라고 수정한 데 이어 ‘희생’이라고 변경하더니 급기야 2013년 초에는 아베 신조 정권 주도로 교과서에서 그 내용을 삭제하는 등 일본은 자신의 선조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미화 혹은 왜곡시켜 왔다. 그럼에도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껏 교과서에 난징대학살은 언급하면서도 관동대지진은 거의 언급을 안하고 있어 문제다.

유엔 국제법에서는 중국의 난징대학살과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을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 범죄로 적용했다. 관동대지진 학살 또한 제노사이드로 인정돼야 할 중대한 사건이 분명함에도 아직 정부 차원의 움직임이 없다.

지난 2014년 19대 국회 여야 의원 103명이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를 설치하는 특별법안을 발의했으나 통과되지 못하고 폐기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100주기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정부 차원의 규명작업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故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는 그간 관동대지진 사건과 관련한 수백 장의 사진을 모았는데 몇 년 전까지도 이 사진을 계속 추가로 사들이고 모으는 등 이 사건의 실체를 낱낱이 밝히기 위해 노력해왔다. 

정 연구가는 지난 2019년 수년간의 작업을 통해 500여장의 사진을 책으로 묶은 ‘사진으로 본 관동대지진의 실체’를 발간하기도 했다. 정 연구가는 40여년간 전 세계를 돌며 자신의 사재를 다 털어 근현대사 기록사진만 7만점을 모았다.

관동대지진 학살 후 만행(1923년). 일본 고등형사가 학살로 죽은 여성 시신의 음부를 대나무 막대기로 찔러보고 있는 모습이다. 지진과는 상관없는 해안가 뚝길에서 학살과 만행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사진이다. 지진 속에서도 그들의 만행이 드러났고, 여성 시신에 다시 악랄한 행위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성추행으로 단죄를 받아야 할 행동이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4.09.03.

사진을 보면 충격 그 자체다. 하의가 벗겨져 있는 여성 시신을 막대기로 찔러보고 있는 고등형사 사진이 있는가 하면, 시신에 소변을 보고 있는 모습 등 일제의 만행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진들이다. 일본의 주장처럼 만약 지진으로 희생된 시신이라 한다면 이 같은 행동은 하지 못할 것이다. 여성 시신들이 대부분 옷을 벗고 있는데 지진 발생 중에 옷을 벗는다는 것 또한 상식에도 맞지 않다. 일본 자경단이 옷을 벗기고 죽였기 때문이란 것이 더 설득력을 얻으며, 그 증거에 대한 사진은 이미 본지가 수차례 공개한 바 있다.

정 연구가는 관동대지진 학살사건 만큼은 억울하게 비참한 죽임을 당한 선조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후손으로서 숙명으로 여기고 사진자료를 통해 규명작업을 해왔다. 그러나 올해 사건 101주기를 한 달도 채 남기지 않고 향년 83세로 눈을 감았다. 

그는 생전에 “일본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는 수도 없이 얘기하고 있으나, 사실상 그 2배 버금가는 관동대지진 대학살 사건은 점점 잊고만 있다. 확실한 사진 입증자료가 있음에도 왜 정부가 나서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이어 “나라를 빼앗기고 힘이 없어 타국에서 무고하게 희생됐는데, 이제는 우리가 진실을 알리고 바른 목소리를 제대로 내는 게 후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다”며 “벌써 100주기가 지났다. 1세기가 지나가고 있음에도 우리가 이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다면 후손으로서 과연 자격이 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故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의 생전 모습. 그는 지난 2022년 7월 20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반드시 해결하고픈 숙원 사업으로 관동대지진 학살 사건을 꼽으며 한 세기가 가기 전에 온 국민이 다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정 연구가는 40여년간 전 세계를 돌며 자신의 사재를 다 털어 근현대사 기록사진만 7만점을 모았다. ⓒ천지일보 2024.09.03.
시체에 소변 만행(1923년). 학살 현장에 일본 자경단들이 조사하고 있는데 우측에 한 명이 시신 위에 소변을 보고 있는 만행 장면이다. 만약 지진으로 희생된 자국민 시신이라면 이 같은 행동을 하지 못하며, 죄책감 없이 이 같은 행동이 가능한 것은 결국 학살한 시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사진인 셈이다. 일본의 장례문화에서는 시신을 방치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4.09.03.
폐허가 된 도쿄시(1923년). 지진으로 인해 도쿄시의 건물 대부분이 무너지면서 폐허가 된 모습이다. 지진이 얼마나 강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4.09.03.
지진으로 화재 발생(1923년). 지진으로 인해 이재민이 된 사람들이 건물 밖으로 나와 있고 건물 곳곳에 화재가 발생해 화염에 휩싸인 모습이다. 이를 두고 조선인이 방화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려 학살하게 만들었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4.09.03.
자경단 인간사냥(1923년). 민간에서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현장에서 살해했다. 이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칼 등으로 무장해 만행을 자행했다. 중절모를 쓴 자경단이 조선인을 사냥하기 위해 쇠꼬챙이를 들고 주변을 살피고 있고 처참하게 살해된 시신들이 그냥 방치되고 있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4.09.03.
소각장으로 시신 운반(1923년). 시신 처리는 살아남은 조선인에게 운반하도록 했다. 자경단의 광기는 상상 이상으로 잔악했던 것이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4.09.03.
인간소각장 참상(1923년). 해안가 넓은 공터에 만행으로 살해된 시신을 이곳으로 옮겨 소각하고 있는 현장이다. 쓰레기처럼 시신을 소각하고 있는 이런 장면을 보고 어느 누가 일본 자국민이라 하겠는가.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4.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