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5주년 기획] 36주 임신중지는 살인? 낙태죄 폐지에도 계속되는 논쟁
의사·산모에게 살인죄 적용 커다란 사회적 논란 불러와 ‘사산’ 여부가 사건의 쟁점 처벌 능사 아니란 목소리 커 ‘안전 중지’ 보장할 법도 無
보건복지부가 36주 된 태아를 임신중지(낙태)한 유튜브 영상이 사실이라며 관련자를 살인 혐의로 수사 의뢰해 파장이 일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2019년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이후, 입법 공백 상태가 지속된 가운데 벌어진 이번 사건은 법적,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섰다. 36주 낙태 사건의 쟁점과 이 사건이 생명권과 선택권을 법적 처벌 기준으로 저울질할 문제인지 등을 짚어봤다.
[천지일보=홍수영 기자] 경찰은 8월 28일 임신 36주 차에 낙태 수술을 받는 과정을 담은 유튜브 브이로그 영상과 관련 수술에 관여한 의료진과 해당 유튜버 등 6명에 대해 출국 금지했다. 앞서 경찰은 같은 달 12일 유튜버와 임신중절 수술을 진행한 병원을 특정해 입건했고, 같은 달 23일엔 의료진 4명을 살인 방조 혐의로 추가 입건했다.
이 사건 수사는 두달 전 시작됐다. 보건복지부는 당시 해당 여성과 수술을 집행한 의사를 수사 의뢰했다. 혐의는 ‘살인’이었다. 34주 태아를 낙태한 의사에게 살인죄를 적용한 법원 판례를 참조했다는 게 복지부의 설명이었다.
일반적인 임신 기간이 40주라는 점을 감안할 때 36주라면 세상 밖으로 나와도 적절한 보살핌이 뒷받침된다면 살 수 있는 시기다. 복지부가 언급했던 해당 재판의 법원 판결문을 직접 확인해 보니 서울경찰청 산부인과 자문의는 34~36주라면 생존율이 99%라고 회신했다.
또 수술에 참여했던 마취의사와 간호조무사 등의 증언을 종합할 때 아기의 움직임과 울음소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물을 담은 플라스틱 양동이에 태아를 방치했다는 증언도 확보했다. 이에 재판부는 ‘태아가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었다’는 피고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 있는 태아를 살해했다고 판단했다. 해당 재판은 2021년 대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이 확정됐다.
경찰이 살인죄를 입증하기 위해선 태아가 살아있는 상태로 분만에 성공했는지를 따져야 한다. 하지만 수술 병원 기록엔 ‘사산’으로 적시됐다. 죽은 상태로 산모 밖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병원장 A씨도 언론을 통해 산모로부터 아이를 꺼냈을 때 이미 사산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해당 병원엔 폐쇄회로(CC)TV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태아 시신이 화장된 사실도 확인됐다. 현 장사 등에 관한 법률(장사법)에 따르면 임신 4개월 이상의 사산아는 부모의 인적사항, 사산의 종류, 사산 원인 등을 기재한 사산 증명서를 화장 업체에 내고 절차를 밟아야 한다. 형식상이긴 하지만 증명서까지 갖춘 것이다.
현재로선 경찰이 살인죄를 입증하기 한층 어려워진 셈이다. 수술실 내부에 있던 다른 의료진이 태아가 살아 있었다고 증언하지 않는 한 마땅한 증거를 찾기 힘들어 보인다는 게 본지가 확인한 법조계 관측이다. 다만 병원 측이 증명서를 조작해 제출했을 가능성이 남아 있다. 경찰에 따르면 화장 의뢰 시기는 복지부가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 날이었다. 이에 경찰은 출국 금지 조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처벌, 위험한 임신중지 늘릴 뿐”
처벌이 가능할지를 넘어 과연 살인 혐의를 적용해 처벌하려는 게 타당한지에 대한 의문도 있다.
먼저 복지부가 언급한 판례에서 피고인은 의사뿐이었다. 그런데 이번 36주 사건에선 산모에게도 살인 혐의를 적용해 수사하고 있다. 일단 살인 혐의를 적용 가능한지 아닌지는 차치한다면, 두 사람이 같은 혐의를 받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는 게 법조인들의 시각이다.
형법 30조에선 ‘공동정범’이라는 규정이 있다. 대법원 판례에 따라 2인 이상이 공동의 의사로 특정한 범죄행위를 하기 위해 일체가 돼 서로 다른 사람의 행위를 이용해 자기의 의사를 실행에 옮기는 것을 공동정범으로 본다. 병원장과 산모를 공동정범으로 본다면 같은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와 관련 노동당·녹색당,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이 참가한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안전한 임신 중지 네트워크)’는 “낙태죄가 존재하던 때에도 낙태죄와 살인죄는 구분됐으며, 임신중지에는 살인죄가 적용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단체는 “이번 사례와 같은 후기 임신중지는 ‘낙태죄’가 존재하거나, 처벌 기준을 아무리 엄격하게 해도 일어나는 일로써, 해당 여성과 병원을 처벌한다고 해서 다시 벌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처벌은 이 결정을 중단시키는 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결정을 지연시키고 더욱 비공식적이고 위험한 임신중지를 만들 뿐이며, 출산 후 영아사망률을 높이게 된다”고 강조했다.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에 따르면 세계보건기구(WHO)는 2010년부터 2019년까지 북아일랜드와 호주, 필리핀, 중남미 및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서 진행된 연구를 모두 분석하고 이를 종합한 결과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은 더 큰 비용을 야기하고, 의료 행위의 음성화와 의료인의 책임 회피로 위험한 임신중지 환경만을 증가시켜 임신중지 결정 시기를 더욱 지연시킬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를 토대로 WHO는 2022년 각국에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를 권고하는 가이드를 발표했다. 국내의 갑작스러운 처벌 논의는 WHO 권고를 역행한다고 볼 수도 있는 셈이다.
◆정부·국회 손 놓은 사이 암암리 진행
이 사태를 불러온 데엔 정부와 국회도 한몫했다는 목소리가 크다. 헌법재판소가 2019년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한 것은 단순위헌 결정으로 법이 한순간에 사라질 경우 큰 사회적 혼란이 예상되기 때문에 완충 장치를 마련해 둘 요량이었다. 헌재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시한을 두고 그사이 관련법을 개정하도록 했다.
하지만 정부와 국회는 시한 안에 형법과 모자보건법 등의 개정안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면서 모자보건법상 24주를 넘어가는 낙태를 여전히 불법으로 규정하면서도 그 안에 낙태를 어떻게 합법적으로 진행하는지, 의사는 어떻게 임해야 하는지 등을 법이 제시하지 못하게 됐다.
WHO가 보장하는 안정성이 입증된 ‘미프진’ 등 임신중지약도 아직 국내에 도입되지 않았다. 복지부는 낙태죄가 효력을 잃기 직전인 지난 2020년 12월 31일 “현재는 허가된 인공임신중절 의약품이 없으나, 2021년 1월 1일부터 인공임신중절 의약품 도입이 가능해짐에 따라 제약회사 등의 허가 신청이 있는 경우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인공임신중절 의약품의 허가·심사를 신속하게 진행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이후 도입된 임신중지약은 여전히 없다. 한 제약사가 수입허가를 받기 위해 시도했으나, 까다로운 조건 탓에 끝내 도입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상 모든 임신중지약이 ‘불법’인 사이, 경찰은 최근 불법 거래를 처벌하겠다며 검토에 나섰다.
안전한 임신 중지 네트워크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의료비는 병원마다 부르는 게 값이고 유산유도제는 여전히 온라인 암시장을 떠돌고 있음에도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며 공적 책임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지금 우리 사회가 중요하게 질문해야 할 것은 왜 ‘낙태죄’ 폐지 이후에도 이전과 다름없이 이처럼 늦은 시기에 임신중지가 진행됐는지, 임신 36주 차가 돼서야 임신중지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이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는지에 관한 것”이라며 생명권과 선택권을 처벌 기준으로 저울질할 게 아니라 실질 여건을 바꿔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체는 “임신중지를 결정했다면 임신 후기까지 지연되지 않고 초기에 안전하게 임신 중지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건의료서비스와 정보제공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며 “보건의료기관의 임신중지 서비스 제공 현황을 파악하고, 필요에 따라 약물이나 수술을 통한 임신중지가 제때 이뤄질 수 있도록 의료기관 간 연계 체계를 구축하라”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