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신화 여행(인도네시아)] 사원으로 변해 버린 공주

2024-07-29     천지일보

글 신현배

옛날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에 프람바난이라는 왕국이 있었다. 이 왕국을 다스리는 사람은 바카 왕이었다. 바카 왕은 이웃 나라의 펑깅 왕과 전투를 벌였다. 군대와 군대가 맞서 용맹스럽게 싸웠다. 전투는 며칠 동안 계속되었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펑깅 왕은 후방을 지키는 장수 반다와사를 불렀다. 그러자 반다와사가 단숨에 달려와 펑깅 왕의 발밑에 넙죽 엎드렸다.

“부르셨습니까?”

“오냐, 잘 왔다. 바카 왕과의 전투에 네가 나서 줘야겠다. 바카 왕의 저항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구나. 어서 달려 나가 바카 왕의 군사를 무찔러라.”

“예.”

반다와사는 펑깅 왕의 명령을 받고 싸움터로 나갔다. 용감무쌍한 장수였던 그는 적진 깊숙이 들어가 바카 왕과 맞섰다.

“바카 왕은 내 칼을 받아라!”

반다와사가 긴 칼을 휘두르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러자 바카 왕이 반다와사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칼날을 번득이며 불꽃 튀는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싸움은 오래 가지 못했다. 늙은 바카 왕이 기운이 펄펄 나는 젊은 반다와사를 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카 왕은 반다와사가 휘두르는 칼에 맞고 땅에 쓰러져 버렸다. 바카 왕의 군사들이 달려왔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바카 왕이 죽자 전세는 급격히 기울어졌다. 바카 왕의 군대는 싸울 힘을 잃고 허물어져 갔다. 반다와사의 칼이 허공에서 춤출 때마다 많은 군사가 가을바람에 흩어져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쓰러졌다. 남은 군사들은 프람바난 궁전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고, 반다와사는 끝까지 그들을 쫓아갔다. 프람바난 궁전은 반다와사에 의해 맥없이 함락되고 말았다.

펑킹 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프람바난 궁전으로 갔다. 반다와사가 궁전 문을 활짝 열어 놓고 펑깅 왕을 맞이했다.

“허허허, 장하다. 네가 프람바난 왕국을 단칼에 쓰러뜨렸구나.”

펑깅 왕은 반다와사의 손을 잡으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송구스럽습니다.”

“네가 큰 공을 세웠으니 내가 특별히 상을 내리겠다. 이 프람바난 궁전을 네게 줄 테니 여기서 살도록 하라.”

반다와사는 프람바난 왕국을 멸망시킨 공로로 프람바난 궁전의 주인이 되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프람바난 궁전에는 바카 왕의 외동딸인 라라 종그랑 공주가 살고 있었다. 반다와사는 공주를 보고 첫눈에 반해 버렸다.

‘야, 예쁘다. 이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단 말인가.’

반다와사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으나 뜨나 공주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반다와사는 밤을 꼬박 새우고 이튿날 아침 공주를 찾아갔다. 그는 잠을 못 자서 충혈된 눈으로 공주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이렇게 말했다.

“공주, 나는 공주를 사랑하오. 공주가 없으면 단 하루도 못 살 것 같소. 나와 결혼해 주시오.”

라라 종그랑 공주는 반다와사의 청혼을 받고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이 사람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야. 원수하고는 절대로 결혼할 수 없어.’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다짐했지만 그 자리에서 단번에 청혼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만일 거절했다가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까 말이다. 공주가 아무 대답이 없자 반다와사가 말했다.

“사흘 말미를 주겠소. 사흘 뒤에 다시 찾아올 테니 그때 나의 청혼에 답해 주시오.”

반다와사는 그리움이 담긴 눈빛으로 공주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총총히 사라졌다. 공주는 고민에 빠졌다.

‘나는 솔직히 반다와사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거절했다가는 가만있지 않을 텐데.’

공주는 보복당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공주가 머리를 싸고 드러눕자 늙은 시녀가 찾아와 물었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생기셨습니까?”

공주는 한숨을 길게 쉰 뒤 말문을 열었다.

“반다와사가 내게 청혼했어. 그의 청혼을 거절할 좋은 방법이 없을까?”

늙은 시녀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공주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해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공주님, 반다와사는 무서운 장수입니다. 그에게 잘못 보였다가는 저주를 받아 엄청난 재앙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는 마십시오. 그의 청혼을 승낙하되 일정한 조건을 붙이십시오. 이러이러한 일을 언제까지 해내야 결혼한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을 붙이는 게 좋을까?”

“이를테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맡기는 겁니다. 하룻밤 말미를 줄 테니 그동안 사원 천 개와 우물 두 개를 만들어 달라고 해 보십시오. 자기가 무슨 수로 그것들을 하룻밤 사이에 만들겠습니까? 따라서 이 결혼은 무효가 될 것입니다.”

공주는 늙은 시녀의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네가 일러 준 대로 해야겠다.”

공주는 고민을 해결했다며 크게 기뻐했다.

마침내 반다와사와 약속한 날이 돌아왔다. 반다와사가 공주를 만나러 왔다.

“자, 이제 대답해 주시오. 나의 청혼을 받아 주겠나, 받아 주지 않겠나?”

공주가 거리낌 없이 말했다.

“반다와사 장수님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오늘 밤 사이에 사원 천 개와 우물 두 개를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만일 이 일을 이루지 못하면 저는 장수님과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좋습니다. 약속하지요. 오늘 밤 사이에 사원 천 개와 우물 두 개를 만들어 보이겠소.”

반다와사는 공주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공주와 헤어져 펑깅 왕이 사는 궁전으로 향했다.

‘사원 천 개와 우물 두 개라…. 아버지가 거느린 마녀 부대라면 이 정도쯤은 너끈히 만들 거야. 게다가 펑깅 왕이 자랑하는 정예 부대가 또 있지 않은가.’

반다와사는 먼저 궁전에 들렀다. 펑깅 왕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반다와사는 라라 종그랑 공주의 제안을 왕에게 설명했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나라의 보배인 반다와사가 장가를 가겠다는데 내가 도와 줘야지. 군사들을 동원하여 사원과 우물을 만들도록 하라. 오늘 밤 사이에 사원 천 개와 우물 두 개쯤 거뜬히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반다와사는 펑깅 왕의 승낙을 받아 낸 뒤 아버지 집으로 갔다. 아버지 다마르마야는 마침 집에 있었다. 아들의 이야기를 다 들은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했다.

“염려하지 마라. 이 아비만 믿어라. 마녀 부대가 얼마나 무서운 부대인지 아니? 마녀들이 나서면 하룻밤 사이에 사원 만 개, 우물 천 개도 만들 것이다.”

해가 기울어지자, 프람바난 궁전 앞의 넓은 들판으로 펑깅 왕의 군사들과 마녀 부대 마녀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원과 우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반다와사는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일하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손놀림이 번개 같았다. 자정쯤 되었을 때는 사원을 오백 개나 만들어 놓았다. 반다와사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대단한 솜씨야.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날이 새기 전에 나머지 오백 개의 사원도 가볍게 짓겠는걸.’

반다와사는 마음이 놓였다. 긴장이 풀리자 졸음이 쏟아졌다.

‘잠깐 눈을 붙이고 오자. 오늘 밤 안에 거뜬히 끝낼 일인데, 밤을 꼬박 새울 필요는 없잖아.’

반다와사는 하품을 하며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새벽 4시가 되자 공주의 늙은 시녀가 염탐하러 왔다. 늙은 시녀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들판에 세워진 사원 수를 세어 보았다.

“……구백아흔셋, 구백아흔넷, 구백아흔다섯…….”

늙은 시녀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우물 두 개는 이미 파 놓았고, 인제 다섯 개만 더 지으면 사원 천 개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늙은 시녀는 들판 옆에 있는 마을로 달려가 집마다 돌아다니며 잠든 처녀들을 깨웠다.

“일어나세요. 제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 공주님이 큰일 나요. 임금님의 원수인 반다와사의 아내가 된단 말이에요.”

늙은 시녀의 말을 듣고 마을 처녀들이 깨어났다. 그들은 늙은 시녀가 시키는 대로 마당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집마다 불을 환히 밝히고 절구 앞에 섰다. 속이 우묵한 통에 곡식을 담고 절굿공이를 손에 들었다. 늙은 시녀가 신호를 보내자 마을 처녀들은 일제히 절구질을 시작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지?”

마녀들은 절구질 소리를 듣고 하던 일을 멈추었다. 그들은 대낮같이 밝은 마을 쪽을 돌아보았다. 마을 처녀들이 열심히 절구질을 하고 있었다.

“앗, 아침이다! 그만 돌아가자.”

마녀들은 서둘러 들판을 떠났다. 펑깅 왕의 군사들도 그 뒤를 따라 궁전으로 돌아갔다.

늙은 시녀는 들판에 세워진 사원 수를 세어 보았다.

“……구백아흔일곱, 구백아흔여덟, 구백아흔아홉…….”

천 개에서 하나가 모자랐다. 늙은 시녀의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늙은 시녀는 궁전으로 달려와 공주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공주는 뛸 듯이 기뻐했다.

아침 해가 밝아오자 반다와사가 들판에 나타났다. 그는 들판에 세워진 사원들을 만족스럽게 둘러보고는 하나하나 세어 보았다.

‘아니, 이럴 수가!’

반다와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전부 구백아흔아홉 개였던 것이다.

‘이상하네. 왜 한 개가 모자라지? 그 시간이면 충분히 끝낼 수 있었을 텐데.’

반다와사는 아무래도 미심쩍어 펑깅 왕의 군사들과 마녀들을 만나 보았다.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마을에서 처녀들이 절구질을 하기에 아침이 된 줄로 알았어요. 그래서 일손을 놓았지요.”

“뭐라고? 그, 그게 정말인가? 맙소사, 속았구나. 공주와 마을 처녀들의 잔꾀에 넘어갔어.”

반다와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고얀 것들! 감히 나를 속여? 프람바난의 모든 처녀들은 평생 혼자 살다가 늙어 죽어라. 그리고 라라 종그랑 공주는 천 번째의 사원으로 변해 버려라.”

반다와사는 마구 저주를 퍼부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저주가 모두 이루어졌다. 저주받은 프람바난의 모든 처녀들은 그 뒤부터 아무도 결혼하지 못했다. 모두 노처녀로 늙어 죽었다고 한다. 또한 라라 종그랑 공주도 사원으로 변해 버렸고 말이다. 이 사원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프람바난 사원이다. 8~9세기경에 세워진 힌두교 사원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으로 손꼽히고 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신화 이야기 해설>

이 이야기는 결말 부분이 비극으로 끝난다. 반다와사를 멋지게 속이지만 반다와사의 저주가 그대로 이루어져 라라 종그랑 공주가 사원으로 변해 버리고, 마을 처녀들은 평생 노처녀로 살다가 늙어 죽게 된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나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꾀보 아난시’ 이야기다. 꾀를 남을 속이는 데 쓰면 큰코다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준 셈이다.

라라 종그랑 공주가 너무 가엾다. 공주를 위해 속임수를 쓴 것은 늙은 시녀였는데, 반다와사에게 보복을 당했으니 말이다.

공주는 왜 반다와사의 청혼을 받고 그와는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반다와사는 싸움터에서 공주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다. 그런 사람하고 어떻게 결혼을 하겠는가? 그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또 생각할 점이 있다. 당시에 인도네시아에서는 힌두교를 믿고 있었다. 힌두교에서는 결혼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하면        결혼 생활은 현세에 그치지 않고 내세에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니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라라 종그랑 공주는 반다와사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하룻밤 사이에 사원 천 개와     우물 두 개를 만들어 보이라고 한다. 그러자 반다와사는 자기 아버지가 거느린 마녀 부대 마녀들과 펑깅 왕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사원과 우물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옛날부터 마녀니 유령이니 하는 존재를 확실히 믿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에도 인도네시아 사람들 가운데는 유령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다고 한다. 그만큼 영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잠든 사람을 깨울 때도 서둘러 깨우지 않는다. 사람이 잠든 사이에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와 돌아다닌다고 믿기에, 영혼이 돌아올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이 이야기에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또 다른 특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여러 사람이 함께 하려는 ‘집단주의’ 성향이다. 늙은 시녀의 작전에 따라 마을 처녀들은 일제히 절구질을         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일에 참여하여 마녀들을 속일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함께하기를 좋아한다. 문병갈 때도 친척들이 한 차로 우르르 몰려가고 성지 순례도 마을 사람 전체가 함께 떠난다. 인도네시아에는 6천 개가 넘는 섬과 6만 7천 개의 마을들이 있다. 인구도 2억이 넘으니 서로 뭉치지 않았다면 사회가 잘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