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독립운동의 발자취⑬] 시대의 동행자, 황에스더
2015-09-20 천지일보
‘동행(同行)’이라 함은 일정한 곳을 향하는 길을 함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물론 동행의 대상이 가족, 친구, 사회, 국가, 시대 등 어느 범주로 국한시키는 가에 따라 그 의미도 해석도 달리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에 있어서 동행의 의미는 ‘조국 독립이요 조국독립을 위한 길’ 그 자체였다. 그 길에는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이거나 동참했던 이들, 남성 또는 여성이든 상관없었다. 그들은 오직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그 길에 동행한 이들이었다.
소개하고자 하는 황에스더(황애덕·황애시덕·黃Esther, 1892~1970년)도 직면했던 그 시대에 국내외 구국운동을 실천한 것은 물론 ‘여성’ ‘주체’ ‘기술’ ‘독립’의 수식어를 부각시킨 인물이다.
1892년 4월 19일 평양 의성 출생으로 부친 황석청(黃錫淸)과 모친 홍유례(洪裕禮)의 1남 6녀 중 넷째로 태어난 황애덕은 배움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진 여성이었다. 오랜 기간 동안 선교활동을 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해외 선교사와 안창호, 조만식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직접적으로 교류하면서 민족이 처한 현실과 한국여성이 해야 할 과제를 직시했다.
숭의여학교 비밀결사대 조직의 뒤에서 조력했던 교사,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발족시킨 일원, 일본 도쿄 2.8독립선언의 현장에선 여학생, 그리고 민족 해방 의지를 다지며 3.1만세운동의 현장에서 외쳤던 여성독립운동가,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한국독립운동의 절실함을 외쳤던 강연자, 황애덕은 그렇게 시대에 당당히 맞섰다.
그는 조국독립과 더불어 국가부강을 염려하며 부강한 나라를 이루기 위해 ‘선진기술’ 도입과 기술교육의 일선에 여성의 진취적인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실천은 농촌계몽운동과 직업기술교육으로 피어났다.
1932년 12월 박인덕, 최활란, 정현숙과 함께 ‘조선직업부인협회’를 개편한 것을 시작으로 문명퇴치, 의식개혁, 계몽운동의 일선에서 ‘독립’을 염원했고, 이후 그 불씨를 양산하는 데 주력했던 그는 해방 이후에도 6.25전쟁의 여파로 피폐해진 고국의 재건에 힘을 보탰다.
또한 고아와 여성의 자립을 위해 시작한 기술교육은 ‘한미종합고등기술학교’의 설립의 참여로 이어져 여성의 권익보호에 앞장서는 데 주력했다.
“무너진 내 집과 내 강토를 내손으로 건설하겠다”고 외쳤던 여성독립운동가 황애덕! 그는 시대의 한계에 당당해 맞서며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 동행자이자 여성리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