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독립운동의 발자취⑪] 평남도청에 폭탄 투척한 임산부, 안경신
2015-08-22 천지일보
그 시대에는 진정 ‘독립’을 위한 길에 남녀의 구분이 없었다. 어떤 한계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실천했던 여성독립운동가의 삶도 그러하다. 안경신! 그녀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단지 그녀의 형상을 묘사한 그림과 수감기록, 신문보도자료 등 몇 점이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행적이 각인되는 것은 임산부의 몸으로 일제를 향해 폭탄을 투척했던 그녀의 과감함과 실천성에서 베어나는 나라사랑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1920년 8월 3일 밤, 내 고향과 내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평남도청에 폭탄을 투척한 임산부 여성, 그녀가 바로 안경신(安敬信, 1895년~?)이다.
안경신은 평안남도 출생의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평양여자고등학교 2년 과정을 수료했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평양 서소문 지역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29일간 구금되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조직된 국내외 여성 항일단체 활동의 흐름에 힘입어 평안도 지역에서 조직된 대한애국부인회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전달하는 교통부원으로 활동,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파악한 독립운동가로 거듭났다.
일제의 식민정책이 본격화되고 국내의 항일단체 및 관련 인물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던 시기에 평남도청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1920년 8월 미국 상하의원단 100여명이 동양시찰차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은 일제통치기구의 파괴와 세계여론을 환기시킬 수 있는 충분한 기회라고 포착되었다. 그 시기에 평남도청 폭파와 임신 7개월의 23세 안경신의 존재는 ‘여자 폭탄범’이라는 수식어를 넘어서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안경신은 평양 지역 의용단원들과 직접 폭탄을 소지하고 현장에 투척했다. 그 사건으로 1921년 5월 10일자 매일신보에 평남 경찰부 폭파범으로 안경신이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올랐다. 그녀는 1심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지만 임시정부의 구명노력으로 2심에서 10년형을 언도 받았고, 옥고 후에는 7년 만에 석방되었다.
민족독립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서슴지 않았던 안경신은 출산, 감옥 수감, 부모님의 사망, 아이의 영양결핍과 장애 등의 고통과 고뇌에 직면했고, 그녀의 출옥 후 행방에 대한 기록은 없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지만 유족의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안경신! 폭탄을 가슴에 품고 조국독립을 염원했던 여성! 아이를 품고 일본을 향해 폭탄을 들었던 임산부! 그녀의 아픈 독립운동의 행적을 이제야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