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속으로] 배구와 함께한 50년-정년 맞은 조영호 한양대 교수의 삶과 교육철학

2013-12-03     천지일보

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1991년 11월 일본 기후에서 벌어진 남자배구 월드컵 B조 경기 한국과 독일전. 세트스코어 2대 2로 맞은 5세트 11-14로 뒤진 상황에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랠리포인트 시스템방식으로 1점만 내주면 경기가 끝나 바르셀로나올림픽 진출이 좌절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한국은 불꽃처럼 일어났다. 3점차를 따라붙으며 듀스를 만드는 데 성공한 뒤, 결국 17-15로 승리해 올림픽 진출의 발판을 만들었다. 전력이 우위에 있던 독일을 물리친 뒤 한국은 여세를 몰아 남은 두 경기에서 이겨 올림픽 본선에 극적으로 진출했다. 이 대역전 드라마는 1976년 박스컵서 7분 만에 3골을 기록한 차범근,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과의 결승전 승리, 2002 한일월드컵 16강전 이탈리아전 안정환의 연장골든골, 2002 부산아시안게임 중국과의 남자농구 결승전 승리 등과 함께 한국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경기로 꼽혔다.

이 때 만 43세의 나이로 대한배구협회 전무이사로 활동한 조영호 한양대 교수는 당시의 짜릿했던 순간을 22여 년이 지난 지금도 결코 잊을 수 없다.

“대회 시작 전 안병화 대한배구협회장님께서 ‘올림픽 티켓을 못 따면 죽어버려라’라며 특별한 말씀을 해 비장한 각오로 임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경기였는데, 선수들이 몸과 마음을 다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던 것 같다.”  

역전 드라마의 주역들인 조영호 단장과 이인 감독, 하종화, 마낙길 등은 1990년대 한국배구의 최전성기를 열었으며 2000년대 프로배구가 출범하는 데 디딤돌을 만들었다. 세계배구연맹 최우수심판, 4연속 올림픽 배구심판, 국내 최장수 배구대회인 청호기 9인제 배구대회 창설 등을 주도하며 배구계의 ‘살아있는 역사’로 불린 조영호 교수가 지난달 27일 모교인 한양대에서 정년 기념강연을 했다. 내년 2월 정년퇴임하는 조영호 교수는 이날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하자’라는 주제를 갖고 1시간여 강의를 했다. 한양대 예술체육대학장을 지낸 김종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을 비롯한 체육계와 학교 관계자, 재학생 등 100여 명이 참석한 정년강의서 대학 교수, 배구인 두 가지의 길을 걸으며 큰 족적을 남긴 조영호 교수의 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와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봄, 일간스포츠 배구담당기자로 처음 만났던 조 교수는 당시 30대의 나이로 당당한 체격과 건강을 지녔었다.

조 교수는 “전남 땅끝 벌교라는 시골 동네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한양대로 진학했을 때, 촌놈이 출세했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대학 초년생 때 법학, 자연과학, 문학 등 체육대서 강의하는 교양과목 등을 따라가느라 힘들었다. 모르니까 열심히 수업에 개근하며 공부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체육대 수석졸업, 한양대 전체 수석졸업의 영예까지 안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9인제 세터출신인 조 교수는 “훌륭한 체육선생님과 인정받는 배구심판을 목표로 열정적인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자세를 견지하고 살아왔는데, 두 가지 모두 어느 정도 결실을 맺은 것 같아 나름대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학교서는 몸이 건강하고 가슴이 따뜻한 학생을 키우는 선생님으로, 배구 코트서는 공정한 경기운영과 판정으로 배구발전에 기여하는 심판으로 많은 활약을 펼쳤다. 한양대 학생처장, 한양대 체육대학장, 스포츠 경영학회 회장, 세계배구연맹 심판위원, 대학배구연맹 회장, 대한배구협회 부회장 등 화려한 경력이 이를 잘 말해준다. 20대 초반 고향인 벌교에서 청호기 9인제 배구대회를 창설, 매년 10~11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대회를 열고 있다. 청호는 그의 호이다.

조 교수는 학생제자들을 위한 덕담으로 “미소, 인사, 대화, 칭찬의 줄인말인 ‘미인대칭’을 잘해야 참다운 인생을 살 수 있다”며 “어떠한 조직이나 회사서도 인간관계를 잘 하기 위해서는 미인대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개인주의와 승부주의가 만연한 오늘의 스포츠계서 따뜻한 교육과 추상같은 판정을 추구했던 조영호 교수의 삶이 후학들에게 희망과 빛으로 이어져 나갔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정년을 축하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그의 자리가 워낙 컸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