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평론] 대통령의 화법
박상병 정치평론가
구경꾼 방식은 안 돼
대통령의 말은 곧 국정에 대한 신뢰를 상징하는 척도로 기능한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갈등이 수습되기도 하고 반대로 새로운 갈등이 증폭되기도 한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졌던 사례를 우리는 수없이 경험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아마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적절치 못한 단어에다가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화법으로 인해 집권 내내 그의 담론 정치는 폭풍 전야처럼 긴장의 연속이었다. 다만 잘 해석을 하면 예리하고 호쾌한 면이 적지 않아 열혈 지지층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강점이었다.
그럴듯한 표현을 하면서도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정도로 화법 자체의 문제가 심각했던 경우는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이를테면 2011년 6월, 감사원과 국세청 등 권력기관 고위 인사들의 부패문제가 불거져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온통 나라 전체가 비리투성이 같다”고 했다. 말은 맞다. 그러나 그 말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을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화법으로는 상대방을, 또는 국민을 설득시킬 수 없다. 국정에 대한 책임감이나 신뢰감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겠는가. 물론 국민도 그런 대통령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처럼 하나마나한 얘기, ‘사돈 남 말 하는 방식’은 안하느니 못한 법이다. 오히려 반감과 저항만 촉발시킬 따름이다.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말 한마디라도 진중하고 가볍지 않은 것이 박근혜 대통령의 강점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여성 대통령으로서 그 진중한 발언은 품격과도 연계돼 강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가볍고 말이 많거나 또는 사돈 남 말하는 식의 ‘싸구려 담론정치’와는 결을 달리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박근혜 대통령의 담론정치에도 조금씩 흠결이 발견되고 있다. 이른바 ‘구경꾼 화법’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2일 정부의 세제개편안과 관련해 “서민경제가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인데 서민과 중산층의 가벼운 지갑을 다시 얇게 하는 것은 정부가 추진하는 서민을 위한 경제정책 방향과 어긋나는 것”이라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 달라”고 말했다. 한 번 결정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불변의 원칙’도 아름답지만, 국민이 아플 때는 자신의 원칙마저 거둬들이는 것은 더 아름답다. 이런 점에서 박 대통령의 ‘원점 재검토’ 발언을 탓할 수는 없다. 아니 칭찬할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부의 세제개편안에 대해 박 대통령이 마치 ‘구경꾼’처럼 발언했다는 점이다. 명색이 박근혜정부 5년의 세제정책 기본을 확정한 것인 만큼 박 대통령이 수차례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번 발표 내용에 대해 마치 자신은 몰랐던 것처럼 국민을 앞세워 재검토 지시를 했다는 점이다. 세제개편안을 만든 관료들은 이런 박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박 대통령이 먼저 최소한의 유감 정도는 밝혔어야 했다. 자신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그것이 진정성 있는 모습이고 책임 있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