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진책 국립극단 예술감독 ⓒ천지일보(뉴스천지)

손진책 국립극단 예술감독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3월의 눈’ ‘오이디푸스’ ‘보이체크’ 등 연극 일정표가 빼곡하게 적힌 화이트보드가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작게 파인 벽에 15~20㎝가량의 불상이 놓여 있다. 그 앞에 펼쳐진 탁자 위에는 다기가 놓여있다. 다음 달 10일까지 공연되는 연극 ‘보이체크’ 포스터가 곳곳에 붙여져 있다.

불상과 다기 외엔 수 년 전에 진행했던 공연 포스터부터 공연 관련 책 등 모든 게 연극과 관련된 것이다. 집무실 주인이 들어오기 전까지 프레스콜과 기자간담회에서 봤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늘 말을 아끼면서도 자신의 연극에 대한 소신과 철학을 밝혀 온 예술감독이 과연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지난달 20일 서계동에 위치한 국립극단에서 손진책(64) 예술감독을 만났다.

-저기 보이는 작은 불상이 인상적이다. 불자인가.

‘멀티 종교인’이다. 책상에는 부처님과 예수님, 성모 마리아님의 상이 있다. 난 누구를 믿는 게 아니다. 파인 벽에 무엇을 놓아야 할지 몰라서 불상을 놨다.

-연극 ‘보이체크’ 연출을 직접 맡았다.

독일의 천재적인 작가 게오르그 뷔히너(Georg Buchner)의 작품이다. 미완성된 작품이지만 인간의 본질을 충분히 짚고 넘어간다.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닌 고전이자 한국에서 살아가는 현재 우리들이 공감할 수 있는 동시대성을 가진 작품이다.

-국립극단 예술감독 직을 맡은 지도 10개월(7월 기준) 정도 됐다. 국립극단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을 것 같다.

먼저 재단법인으로 출범한 것이 가장 큰 변화다. 극단 미추를 운영했을 때 재정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었다. 예산이 없으면 투자를 받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재정을 마련했지만 국립극단은 국가기관으로 선이 분명하다. 이러한 이유로 도전적인 작품이나 기획사업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자립도를 높여야 한다. 국립극단이 재단법인으로 발족한 만큼 새로 시작하는 일도 많다.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며, 연극계 현실을 직시하고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대안을 찾아야 한다.

-국립과 민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국립은 대표성이 있어야 한다. 최고의 연극을 지향하고 만들어야 한다. 또한 국민의 연극이 되고 국민의 극단이 돼야 한다. 민간극단은 극단이 추구하는 방향이 있고 고유의 내향적인 가치를 중요시하지만 국립극단은 관객을 향한 외향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아울러 한국 연극의 지표가 돼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국립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어린이를 위한 연극 교육을 준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지난 4월 국립어린이청소년극단을 설립했다. 외국의 경우 이미 어린이 연극단 활동이 활발하다. 어릴 때부터 연극을 접하면 말하기와 민주주의적인 사고, 대인관계, 종합예술 등 전인교육에 좋다. 그리고 연극을 일찍 접한 어린이는 커서도 연극을 쉽게 접한다.

-조연출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기사를 봤다. 최근 뮤지컬이 연극보다 상대적으로 대중의 인기를 더 받고 있다. 이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특별히 연극계가 더 어려워지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공연은 전통 연극이 바탕이다. 뮤지컬은 시류에 따라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다. 연극은 항상 그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어느 시대나 힘들고 상황이 어려운 게 연극이다. 최근 공연계를 보면 엔터테인먼트 위주다. 이는 수용자의 기호에 따라 상업적인 뮤지컬이 각광받고 있을 뿐이다. 연극은 계속 그 자리에 있으면서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엔터테인먼트 위주의 시대에 공연계가 고루 발전할 수 있도록 문화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한다. 엔터테인먼트화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립까지 상업성에 물들어 관객들의 기호에 맞출 필요는 없다. 국립극단은 새로운 시대에 선도해야 한다. 나는 국립극단의 연극이 인간의 초탈,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민하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무극 ‘화선 김홍도’를 보면 국립극단이 전통 연극만 고집하지 않는 것 같다. 실험적인 요소도 있는 것 같다.

실험적이라기보다 장르를 넘나드는 것이다. 통섭의 시대이지 않은가. 연극에는 음악과 무용, 문학 등이 녹아 있다. 우리 연극은 가무극이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국립극단에 들어오면서 국민에게 연극을 돌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국민이 연극을 가까이 접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좋은 연극을 만들어야 하고 연극을 또 보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 이 외에도 국립극단의 60년사를 자료 책자로 남기고 학술적으로 정리·출판할 계획이다. 연극인을 위한 교육시스템을 만들어서 한국 연극계에 보탬이 됐으면 한다.

 

연극 ‘보이체크’ 시놉시스

이발병 요한 크리스티안 보이체크는 늘 바쁘다. 이발병으로 일하면서 의사의 실험대상이 되고 그 돈으로 마리와 그녀의 사생아 이아를 먹여 살린다. 그는 이 둘을 위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보이체크를 실험대상으로 바라보는 의사는 그를 가장 하등한 인간으로 간주하고 완두콩만 먹이는 실험으로 인간의 생물학적 영역만 탐구한다.
장기간 실험으로 보이체크는 환청과 환영에 시달리고 자신이 가장 아끼는 마리가 군악대장의 유혹에 넘어가자 그녀를 살해하고 자신도 연못에 투신한다. 비인간적인 환경에 의해 무력한 인간은 파멸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작품은 실제 일어난 형사사건을 극화했다.
연극은 권력과 착취의 세상에서 비인간적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린다.
이번 공연은 폴란드 출신의 세계적 거장 타데우시 브라데츠키 연출과 국립극단과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난달에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브라데츠키 연출은 “현대 비극인 ‘보이체크’는 영웅도, 왕도 아닌 그저 가난한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며 “연극은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고, 어떤 중요한 가치가 인간을 이끄는지 생각하게 한다. 가장 진지한 질문은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에 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극 ‘보이체크’는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9월 10일까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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