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맹기 서강대 언론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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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 시대가 깊어가는 가을 날씨와 같이 피부에 직접 와 닿는다. 하늘은 맑고, 스산한 바람은 온몸을 파고든다. 이때일수록 권력자는 권력의 무상함을 느낀다. 그 속을 파고들어간 이단아 언론은 권력자의 틈새를 주지 않는다. 1990년대 초부터 엄습한 인터넷 시대는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이젠 그 질서로 살아가도록 모두에게 강요한다. 신자유주의는 지식인들에게 회자됐지만, 사물인터넷 시대의 명제는 모른 세계인의 피부 속으로 파고든다. 사실은 사실대로 말하시오.

정보를 다루는 전문직 종사자는 이 혁명적 사조에, 구도적(求道的) 삶을 필요로 한다. 어느 때보다 자유와 독립적 사고가 필요하다. 기자 개인이 만들어낸 정보와 뉴스가 전 세계인에게 공유된다.

미국인 데이(Benjamin Day)는 1833년 9월 3일 뉴욕선(The New York Sun)을 창간했다. 이는 최초의 대중신문이었다. 우리가 말하는 언론(the press)의 시초인 것이다. 증기 동력이 발명되면서, 고속 윤전기가 설치됐다. 언론에게도 그 혜택이 돌아갔다. 세계의 역사는 그 전과 그 후가 많이 달라졌다. 과히 혁명적 발상이 일어난 것이다. 인쇄 매체에서 쓰는 점묘술은 전자파가 동원돼 그림을 그려내는 방송의 원리와 같은 양태이다. 여기서 쓰이는 프레스는 ‘누르다’로 인쇄를 하지만, 동시에 기득권자에게는 ‘압력을 가한다’란 의미를 지녔다.

산업혁명의 여파로 뉴욕선이란 신문이 나오게 됐다. 기술이 변화하는데 사회가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신문은 ‘모든 사람에게 빛을(It shines for all)’이란 거창한 구호를 내세웠다. 지금까지 기득권자의 편에서 그들의 지갑을 열도록 했는데, 이젠 그들이 아니라 대중을 상대하겠다는 소리를 한 것이다. 대중신문은 그들을 억압했던 기득권자에게 압력을 가하겠다고 한다. 대중신문은 기득권자에게 스산한 가을바람과 같이 다가갔다.

대중신문이 갖고 온 무기는 사실에 근거한 ‘인간의 관심사’이다. 언론인들은 현미경 상에 콜레라균의 생김새를 사실로 전했다. 어떤 환경에 창궐하는 것인가를 알려주고, 또한 법정에서 증거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고위 공직자 뒷조사는 흥밋거리였다. 정보의 정확성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들은 ‘가짜 뉴스’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다.

같은 맥락에서 사실주의자(寫實主義者)로 이름을 올린 대표적 연구자는 랑케(Leopold von Ranke)였다. 그는 1차 사료로 과거의 정파성 사고나, 주관적 역사관을 뒤로 하고 새로운 사실에 근거한 사실주의 역사관을 폈다. 그가 활동했던 1830년 당시 벨지움 혁명은 좋은 사료를 제공했다. 이 혁명으로 고문서 보관소(archives)가 열리고, 문서가 쏟아져 나왔다. 그전까지만 해도 정치와 외교 문제는 왕의 고유권한이어서, 백성이 쉽게 근접할 수 없었다.

더욱이 외교문서는 다른 나라와 맺은 조약이 공개되면서 상대 국가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됐다. 이런 연유로 유럽사회는 여기저기에서 동시에 혁명이 일어났다. 프롤렌스, 밀라노, 나폴리, 모데나, 베니스 등이 혁명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혁명정부의 언론인은 경쟁적으로 자국의 왕이 잘못한 실정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역사가는 그 때 사실주의 역사를 쓸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얻었다. 역사가는 편견이 없는 사실을 사실대로 전하게 된 것이다.

랑케는 회고록을 뒤지고 일기, 서한, 외교 문서와 보고서, 목격자의 증언 등 사료가 될만한 것은 챙겨 글로 작성했다. 그 사료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실주의 역사를 쓴 것이다. 그러나 언론인은 대부분 그렇게 책상머리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아니다. 물론 논설, 해설위원들은 쾌락(pleasure), 이해(understanding) 그리고 이성(reason)을 바탕으로 글을 쓸 수 있다. 쾌락은 기쁨을 줄 수 있고, 이해는 논리적 근거를 제공할 수 있고 그리고 이성은 선악의 구분을 하고, 도덕감과 윤리감을 가질 수 있게 한다.

논설위원들은 사회를 묶을 수 있는 가치를 찾을 수 있게 한다. 공통의 사치는 사회의 갈등을 해소시켜주고, 사회의 정의를 실현시켜준다. KBS가 내세우는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도 그런 가치 실현일 것이다. 물론 그 정신은 자유와 독립에서 온다. 의존적 부역자는 절대 그런 가치를 실현시킬 수 없다. 정치에 가까이 갈수록 인간 심성을 들뜨게 만들고, 마음을 황폐화시킨다. 최근 ‘생계형 좌파’가 진정 진보의 길을 걷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정치 광풍사회에서 방송 간부나, 일선 기자를 만난다. 마감 시간에 쫓기는 이들이다. 그 수준이 감각적 차원에 머무른다. 모든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는 질 낮은 수준의 영역은 선정적 보도(sensational journalism)가 딱 맞다. 그리고 폭로 저널리스트(muckraker)가 안성맞춤이다. 가치관은 시간과 장소의 콘텍스트에 따라 춤을 춘다.

기자의 자유와 독립정신은 저만큼 멀어진다. 시도 때도 없이 열정과 탐욕의 마각을 드러내는 정치인과 만난다. 언론은 그들의 나팔수가 되거나, 선전자가 된다. 선거 때는 그들을 위해 선수로 같이 뛴다. 말은 재난방송사인데, 사람 중심의 재난방송을 한다. 그게 그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기 때문이다. KBS 노동조합 성명(2021년 10월 11일)은 ‘검언유착 오보’를 양산했다고 한다.

조직의 지혜를 모으는 대신, 동료를 적으로 간주한다. 문제 인물이 득실거리는 문화에서 공통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쉽지 않다. 변화무쌍한 ‘생계형 좌파’의 속성으로 공영 언론사는 바람 잘 날이 없다. 그게 무슨 혁명적 사고를 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위정자가 봐도 한심한 언론인이다. 그런 인사가 방송사 사장을 꿈꾼다. 물론 진정 언론인이 ‘사실을 사실대로 전한다’라는 말은 쉬운 말인 것 같아도, 구도자적 특성을 갖고 있지 않는 언론인에게 쉽지 않은 주문이다. 물론 사물인터넷 시대의 ‘지구촌’은 그런 정보를 원한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원론에 충실한 기자에게 ‘가짜 뉴스’라고 하면 ‘당신이나 잘하세요’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이성의 높은 차원은 미학의 차원이고, 공동체 차원에서 선악의 판단을 분명하게 한다. 이를 지키는 언론인에게는 진정,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혁명적 사고이다. 그들에게 ‘가짜 뉴스’는 정치인의 잠꼬대로 들릴 수 있다. 기자는 첫째, 둘째, 셋째도 사실의 정확성이다. 초기 사실주의, ‘인간의 관심사’는 여기서 출발했다. 이들은 그런 문화로 민주주의 문화의 초석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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