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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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현대사의 중심은 단연 김일성(본명 김성주 1912~1994)이다. 김일성은 소련의 든든한 지원을 받아 혜성같이 나타났다.

1945년 8월 하순 어느 날, 스탈린은 소련군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에게 북한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추천하라고 긴급 지시를 내렸다. 바실레프스키는 소련 극동군 산하 88특별여단 소속의 김일성 대위를 추천했으며, 9월 초순 스탈린은 합격판정을 내렸다.

9월 19일에 김일성은 소련 군함을 타고 원산으로 귀국했다. 9월 22일에 평양에 도착한 김일성은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공산당 조직에 착수했다. 김일성은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군사위원 레베데프 등 소련군 간부를 평양의 고급요정으로 초청해 친밀감을 높였다.

9월 28일에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 책임 비서 현준혁이 암살됐다. 현준혁은 조만식과 함께 소련군 로마넨코 소장에게 들렀다가 트럭을 타고 돌아가던 중 평양시청 앞에서 괴한의 총격에 암살됐다. 남북한 최초의 정치암살이었다.

10월 8일에 김일성은 개성 근처의 소련군 38 경비사령부에서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 박헌영을 만났다. 박헌영은 9월 3일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여운형이 급조한 ‘조선인민공화국’을 장악하고 있었다.

저녁에 시작한 회담은 새벽에야 끝났다. 김일성은 조선공산당의 중앙은 평양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헌영은 한반도의 중앙은 서울이니 조선공산당의 중앙도 마땅히 서울이라고 맞섰다. 소련군 민정사령관 로마넨코가 김일성의 편을 들었지만, 결국 서울의 조선공산당을 중앙으로 인정하되 평양에는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分局)을 두는 것으로 타협이 이뤄졌다.

10월 10일에 평양에서는 조선공산당 서북 5도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가 열렸다(북한은 이날을 ‘조선로동당 창당기념일’로 기리고 있다). 10월 13일엔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세워졌다(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권, p102).

10월 14일에 평양에서 7만여명의 군중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 해방 축하 집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이 처음으로 소개됐다. 그런데 군중들의 관심을 끈 것은 김일성의 연설이 아니라 그의 젊음이었다. 만주 벌판에서 축지법을 써가면서 일본 관동군을 무찔렀다는 전설의 영웅 김일성이 겨우 33세의 청년이란 사실에 군중들이 놀란 것이다. 이러자 ‘가짜 김일성’ 논란이 유포됐다.

한편 11월 3일에 북한의 우파 지도자인 조만식이 조선민주당을 창당했다. 당원 수는 50만 명에 이르렀다. 조선민주당의 인기가 시사하듯이 당시에는 반소, 반공 운동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11월 7일 함흥, 11월 18일 용암포에서 학생들과 공산당원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고, 11월 23일에는 신의주 지역 학생 3500여명이 “공산당을 몰아내자” “소련군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그런데 소련군은 무차별 사격을 했고 24명이 사망하고 700여명이 부상당하는 대규모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사건 이후 검거·투옥된 학생과 시민은 무려 2000여명에 달했고, 학생 200명이 유형을 갔다. 이후 북한의 우익은 발붙일 곳을 잃고 남한으로 탈출했다.

1945년 12월 17일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 집행위원회가 열렸다. 이때 김일성은 책임 비서로 선출됐고, 1946년 2월 8일에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돼 북한 정부 최고책임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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