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스포츠 칼럼니스트·스포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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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계 미국인 출신으로 역사가이며 기자로 활약했던 헨드릭 빌럼 판룬(1882~1944)은 자신의 대표적인 저서 ‘예술의 역사(The Arts of Mankind)’에서 ‘모든 음악은 당연히 즉흥적인 것에서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마치 모든 그림이 처음에는 스케치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음악은 사소한 흥미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2002년 한일 축구월드컵에서 4강 신화의 주역 박지성은 한국인으로 첫 프리미어리거로 2005년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뒤 팬들이 만들어준 자신의 응원가 일명 ‘개고기송’을 즉흥적으로 같이 읊조리며 좋아했다. 노래는 “박(지성)~박~ 네가 어디 있든 네 나라에선 개고기를 먹지. 그래도 임대주택에서 쥐를 잡아먹는 리버풀보다는 낫지”라는 가사로 돼 있었다. 내용은 박지성을 응원하는 동시에 앙숙인 리버풀 구단과 팬들을 조롱하는 것이었다.

영어에 서툴렀을 뿐 아니라 영국 축구무대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그로서는 팬들이 불러주는 노래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내용에는 개고기를 먹는다는 한국인을 비하하는 것이 있었지만 자신과 관계없는 일로 받아들이고 이 노래를 들으며 힘차게 공을 찼다고 한다.

하지만 시대와 환경이 다르면 생각과 태도가 달라지듯 박지성은 최근 맨유팬들에 대해 ‘개고기송’을 부르는 것을 자제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맨유팬들이 차별과 비하내용을 담은 응원가를 여전히 부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 4일 맨유 구단 팟캐스트에 출연해 “이 노래를 멈춰달라”고 팬들에게 요청했다.

그는 그때는 팬들이 만들어준 응원가가 고맙고 자랑스러웠기에 가사를 받아들였지만 15년이 흐른 지금은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가사 내용이 영국에만 있는 고정관념이고, 한국인들에 대한 인종적 모욕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누군가를 응원하는 게 아니라 불편하게 만드는 노래를 멈출 때가 됐다고 덧붙였다. 그가 맨유 응원가에 대해 공식적인 자제 발언을 하게 된 것은 지난 8월 말 2021/22시즌 프리미어리그 3라운드 울버햄튼과 맨유의 맞대결 당시 킥오프 전 황희찬이 입단식을 했을 때 맨유 팬들이 개고기송을 부르는 걸 들었던 데서 비롯됐다. 황희찬 같은 후배들이 프리미어리그에서 인종차별적인 대우를 받을 것을 우려한 그는 작심하고 용기 있는 말을 했던 것이다. 맨유도 공식적으로 박지성의 발언에 지지를 표하고 팬들에게 박지성의 요청을 존중해달라고 요구했다. 

노래는 귀로만 듣고 의미를 새겨듣지 않으면 즉흥적인 재미만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노래 속에 담긴 뜻을 새기며 정서와 감정을 교류한다면 가볍게 부르는 응원가라도 다르게 들릴 수 있다. ‘개고기 송’에서도 보듯 문화가 다른 영국 축구에서 치열한 경쟁관계를 이루는 라이벌팀 간에는 팬들이 승리를 위해 저속한 말과 인종차별적인 내용을 담은 응원가를 부르는 경우가 있다.

박지성이 뒤늦게나마 후배를 위해 예전 맨유팬에게 ‘개고기송’에 대해 적극적으로 자제를 당부한 것은 자신이 선수 때 느끼지 못한 생각을 후배를 통해 느끼며 안타까운 심정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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