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고봉산 오르는 길
고봉산 오르는 길

오곡원 고구려 백제 대회전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기록에 안장왕의 남하와 백제군의 패전을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다. 재위 11(529)년 10월에 안장왕이 오곡원(五谷原)에서 백제군과 싸워 이기고 적 2000여 명을 죽였다. (十一年 同十月 王與百濟戰於五谷克之殺獲二千餘級)

당시 백제와 고구려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이 이뤄졌다. 이 시기 백제 성왕은 왕도가 있던 한성지역의 탈환에 목숨을 거는 듯했고 고구려도 국력이 약화 됐지만 호태왕과 장수왕이 이미 공략하여 깃발을 꽂은 한강유역을 재탈환하려는 의지가 대단했던 것이다,

<삼국사기 권제26 백제본기 성왕 7년조>에 <고구려본기>보다 더 상세한 기록이 나온다. “10월에 고구려 왕 흥안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북변의 혈성을 공격하므로 왕은 좌평 연모에게 명하여 보기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원에서 이를 막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2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冬十月 高句麗王躬帥兵馬來侵 拔北鄙穴城 命佐平燕謀領步騎三萬 拒戰於五谷之原不克 死者二千餘人)”고 돼 있는 것이다.

백제군 3만 명이 싸움에 나섰다면 고구려 군사들도 비슷한 규모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오곡원에서의 대 회전은 6~7만에 가까운 병력이 충돌한 큰 싸움이었다고 짐작 할 수 있다.

고구려 백제군이 대회전을 한 역사적 장소 오곡원은 지금의 어디일까. 이 장소는 첫째 고봉산성과 개백현이었던 행주산성과 인근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고봉산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일 수 있다.

고봉산성과 인근의 곡(谷)이 붙은 비명은 고양시 대곡(大谷)이다. 한강을 끼고 있는 대 평원인 이곳은 인근에 능곡, 곡산역이 있으며 군대들이 진주를 암시하는 대정역도 있다. 이 지역을 옛날에는 ‘오곡’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오곡의 ‘五’를 중국의 <설문해자(说文解字, 한나라 시대 만들어진 한자 해설서)>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뜻을 가지고 있다. “오행은 총 2수이니 음양이 하늘과 땅의 한가한 교오이다. 무릇 오라는 숫자는 총 오에 속한 수다. 고문에 오성이라 했다(五行也。从二,陰陽在天地閑交午也。凡五之属皆从五 云云..古文五省).” 오곡이 ‘달을성’이나 ‘대곡’ 등과 연관은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싸움의 패전은 백제에게 매우 치명적이었다. 이 전투 이후로 백제의 한산 구토회복의 의지는 꺾이고 말았으며 성왕은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하기 위해 왕도를 부여로 천도하는 대 역사를 착수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9년 후 백제는 소부리로 천도 하였으며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고 했다. 자신들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한 개혁이었다. 이 후에도 백제는 고구려의 침공을 맞아 전전긍긍했다. 성왕 18(540)년 장군 연회를 시켜 고구려의 우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성왕 26(548)년 고구려가 독산성(지금의 평택?)을 침공했을 때는 신라에게 원군을 청해 겨우 물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를 돕겠다고 한 신라는 소백산을 넘어 한강에 진출하면서 백제와의 동맹을 사실상 깨고 만다. 두 나라 다투는 틈을 이용하여 도살성(지금의 증평)을 차지하고 급기야는 성왕 32년 7월에는 보은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에게 왕이 참수당하는 비운을 당하는 것이다. 그 이후의 한강 지배권은 점점 신라로 이양되면서 고봉산성도 신라의 지배가 시작된 것으로 상정되는 것이다.

고봉산성 정상부에서 찾아진 적색 고구려계 와편
고봉산성 정상부에서 찾아진 적색 고구려계 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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