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문화재 숲 ‘영월ㆍ정선’

단종의 한 보듬은 ‘영월’, 우리네 한을 노래한 ‘정선’

한민족의 삶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한(恨)을 얘기한다. 때론 외세에 짓눌려서, 때론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더 자주는 가진 자들의 농락에 희생된 우리네 선조들의 거칠고 둔탁한 인생이 그렇게 한을 대물림했다. 우리네 恨과 마주할 곳을 찾아 길을 나섰다. 어린 나이에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를 강탈당하고 열일곱에 세상도 등져야 했던 어린 임금 단종의 흐느낌이 있는 ‘영월’과 그 너머 서민들의 애환을 노랫가락으로 풀어냈던 ‘정선’으로 향했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잠들어 있는 ‘장릉’

▲ 단종이 묻혀있는 '단종릉'(위). /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잠들어 있는 '장릉'(아래 좌). / 장릉에 얽힌 단종의 사연을 설명해주는 홍옥님 문화관광해설사(아래 우). (출처: 영월군청) ⓒ천지일보(뉴스천지)

 

기구한 운명, 기막힌 죽음을 맞이한 단종은 죽어서도 외로이 동강에 띄워졌다. 누구든지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멸족한다는 세조의 어명이 두려워 아무도 그 시신을 거두지 못했던 것. 그때 호장 엄흥도가 “옳은 일을 하다 받는 벌은 달게 받겠다”며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모신 곳이 장릉이다. 아름다운 감옥 청령포를 뒤로한 채 단종이 잠들어 있는 장릉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유배를 내려온 후 항상 한양을 그리워했다는 단종은 죽어서도 한양에는 가지 못했다. 조선시대 왕릉 대부분이 경기도나 한양 등 100리 안에 모셔졌지만 유일하게 단종의 능만 한양으로부터 500리 떨어진 지방에 있다. 능의 형태는 또 어떠한가. ‘후릉양식’을 사용해 규모도 작을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홍살문과 정자각, 능상이 일직선 상에 놓이는 왕릉과 달리 홍살문과 정자각이 ‘ㄱ’자로 꺾여 있어 절을 올리면 단종의 옆구리에 대고 절을 하는 특이한 형태를 취한다. 비록 규모도 작고 지방에 있지만 엄흥도를 비롯한 충신들은 죽어서도 단종의 옆을 지켰다. 이같이 다른 왕릉과 달리 장릉에는 많은 충신의 위패를 모셔놓은 ‘충신 사당’이 있다는 게 다른 왕릉과의 차별점으로 꼽힌다.

영월에서 만나 ‘비운의 임금’ 꽃다운 나이에 시들어버린 ‘한이 서린 단종의 삶’은 애환 많고 한 많은 ‘한민족의 역사’와 꽤 닮아 있었다.

(글: 이승연 기자 / 사진: 최성애 기자 / 영상: 손성환 기자)

(고품격 문화월간지「글마루」 8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무더위에도 많은 사람들이 단종의 능 ‘장릉(莊陵)’을 찾았지만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 전까지 약 540년 동안은 외로운 곳이었다. 엄흥도가 버려진 시신을 수습해 이곳에 암매장한 후 중종 11년(1516년)이 돼서야 노산(단종)묘를 찾으라는 왕명에 의해 분묘를 찾아 수축하게 됐다. 그리고 그때부터 치제를 드리고 1967년부터는 매해 제례문화를 보여주는 ‘단종제’를 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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