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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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에 나라가 망하자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 전하가 돼 덕수궁에서 생활했다. 그런데 영친왕의 생모 엄귀비가 1911년 7월에 별세했다. 새옹지마랄까? 1912년 5월에 복녕당 양씨가 덕혜옹주를 낳았다. 61세에 딸을 본 고종은 사는 맛이 났다.

1914년 7월에는 광화당 이씨가 이육을 낳았고, 1915년 8월에는 보현당 정씨가 이우를 낳았다. 늦게 두 아들을 얻은 고종은 더욱 기뻤다. 그런데 1916년 1월에 이육이, 7월에는 이우가 죽었다.

이 시기 다섯살 덕혜옹주가 유치원에 입학했다. 이후 고종은 덕혜옹주와 함께 함녕전에서 지냈다. 덕혜옹주의 재롱을 보며 하루하루를 지내던 고종은 1919년 1월 21일에 식혜를 먹고 갑자기 승하했다.

“묘시(卯時 오전 6시경)에 태왕 전하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하였다(순종 실록부록 1919년 1월 21일).”

그런데 1월 20일의 숙직이 이완용이었고, 일제는 고종의 사망 사실을 하루 동안 숨겼다가 ‘신문 호외’로 발표했다. 일제가 발표한 사인은 뇌일혈이었다. 이러자 ‘고종 독살설’이 널리 유포됐다. 가장 유력하게 퍼진 설은 ‘이완용 등이 두 나인에게 독약 탄 식혜를 올려 고종을 독살했는데, 그 두 나인도 입을 막기 위해 살해했다’는 설이었다(이덕일 지음, 근대를 말하다, p230~231).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고종 인산일(因山日)인 3월 1일에 독립 만세 운동을 벌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명 중 29명이 참석해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2시 반에는 탑골공원에서 5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선언식을 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3.1운동은 8월까지도 계속됐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임시정부가 국내외에서 6개 이상 조직됐다. 가장 먼저 생긴 곳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였다. 3월 17일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는 대통령에 손병희,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했다. 상해에서도 4월 10일에 프랑스 조계에서 임시의정원 대표 29명이 모여 4월 11일 오전 10시에 국호를 대한민국, 민주공화제를 국가체제로 삼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채택했고,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임명했다.

4월 23일엔 서울 봉춘관에서 13도를 대표하는 24명이 모여 임시정부 선포문과 한성정부 명단을 발표했다.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등이었다.

3개의 임시정부 외에도 조선민국 임시정부(서울, 4월 10일), 신한민국 정부(평안도, 4월 17일)등도 등장했지만 이들은 문서로만 알려진 이른바 “전단 정부”였다.

나중에 연해주와 한성 임시정부는 상해 임시정부와 통합했고, 통합된 임시정부는 상해에 두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상해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다. 이는 1899년에 선포된 ‘대한국 국제’에서 규정한 ‘전제 군주국’에서 벗어나 국민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으로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 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라고 돼 있다.

헌법 제1조는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요컨대, 대한민국의 원년은 1919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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