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not caption

문종(文種 ?~BC 472)은 춘추말기 호북성 강릉 부근 출신으로 나중에 월로 이주했다. 범려(范蠡)와 함께 구천을 도와 오왕 부차를 소멸하는 공을 세웠다. 오를 멸한 후 범려가 은퇴하면서 문종에게 도망치라고 권했다. 문종은 병을 핑계로 조회하지 않았다. 누군가 문종이 모반한다고 고발했다. 구천은 문종에게 촉루검(屬縷劍)을 보내며 자살하라고 압박했다. “그대는 나에게 오를 정벌하는 9가지 책략을 제시했소, 나는 3가지만으로 오를 없앴소, 나머지 6가지는 그대에게 있으니, 지하로 가서 선왕과 함께 오를 공격해보시오.” 문종은 자살했다.

구천이 왜 문종을 죽였을까? 월이 일거에 오를 멸한 후, 문종은 범려의 권고를 듣지 않고 월에 남아 승상이 됐다. 그러나 전략상 평화와 칭패를 놓고 구천과 강력한 충돌이 발생했다. 부차가 오자서를 사사한 것처럼, 구천이 자기를 노릴 때까지 문종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의 평화론은 구천의 칭패론과 너무 멀어졌다. 문종은 죽음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왕도와 인간의 본성은 공존할 수 없었다. 야심과 이상은 처음에는 의기투합을 이룰 수 있지만, 1차 목표가 달성되면 반드시 충돌한다.

BC 496년, 오왕 합려(闔閭)가 월을 정벌하다가 패했다. 전투에서 부상당한 엄지발가락의 상처가 도져서 사망했다. 계위한 부차(夫差)가 2년 후에 구천을 대파했다. 구천은 회계산에 포위됐다. 문종이 오의 태재 백비(伯嚭)에게 화의를 요청했다. 부차는 오자서의 간언을 듣지 않고 화의에 동의했다. 구천은 범려와 함께 오로 가서 부차의 종노릇을 했다. 3년 후, 부차가 오자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천을 귀국시켰다. 귀국한 구천은 매일 장작 위에서 잠을 잤다. 또 방문에 쓸개를 걸어놓고 매일 핥았다. 음악과 여색도 멀리하며 잠시도 복수를 잊지 않았다. 유명한 와신상담은 이 고사에서 비롯됐다. 겉으로는 오왕을 잘 섬겼다. 선물이 끊이지 않았고, 서시 등 미녀와 대량의 목재를 보내 오의 국력을 약화시켰다. 오로 보내는 목재가 영암산 아래 강에 쌓였다. 이곳을 목독(木瀆)이라고 부른다. 대내적으로는 휴양생식을 통해 부국강병을 추진했다. 인구증가를 장려해 국력을 강화했다.

BC 484년, 부차가 백비의 주장에 따라 제를 공격했다. 오자서는 제보다 월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듣지 않았다. BC 473년, 월왕이 오를 공격해 오왕을 포위했다. 오를 평정한 구천은 북쪽으로 회수를 건너 서주에서 제, 진의 제후들과 회맹하고, 주왕실에 조공했다. 주왕은 구천에게 고기와 술을 보내고 백(伯)으로 임명했다. 구천은 회수 북쪽을 초와 나누고, 오가 빼앗은 송의 땅을 돌려줬다. 노와는 사수(泗水)의 동쪽 100리를 나누었다. 이 시기에 월군은 장강과 회수의 동쪽을 횡행했다. 제후들이 와서 축하하고 패왕이라고 불렀다. 구천은 해안으로 북상해 산동성 낭야에 새로운 도성을 건설했다. 바다를 등지고, 대륙을 노리는 강력한 야심을 드러낸 조치였다. 이 최강의 시기에 미리 위험을 감지하고 제로 도망친 범려가 문종에게 편지를 보냈다.

구천이 부차에게 패했을 때, 문종이 오로 가서 화의를 추진했다. 구천 부부는 범려와 함께 오로 가서 종살이를 했다. 국정을 주재한 문종은 절강 상류에서 제사를 올렸다. “먼저 가라앉으면, 나중에 떠오릅니다. 화는 덕의 뿌리이고, 걱정은 복의 집입니다. 남을 위협하는 자는 망하고, 복종하는 자는 창성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도리와 위난을 알았지만, 자신의 문제에는 어두웠다. 문종이 범려보다 한 수 아래였던 지점이다. 문종은 사후에 월의 도성 서산에 묻혔다. 서산을 그의 이름을 따서 종산으로 개명했는데, 지금 소흥 시내 와룡산이다. 묘지는 와룡산 망해루 밑이다. 공교롭게도 그의 무덤에서 보면 소흥시 전경이 보인다. 타자를 아는 것은 자신을 아는 것보다 쉽다. 그래서 최종 승패는 자신에게 달렸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